궁예는 실패한 영웅이었을까? 안성, 포천에서 찾은 그의 흔적
▲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궁예모습 우리에게 궁예의 이미지는 드라마 <태조왕건>을 통해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그의 일생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가득하다.
역사를 따라가는 인물 이야기의 첫 주인공은 다름 아닌 궁예다.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 일대는 삼국이 만나는 지점과 요충지였던 만큼 수백 년 동안 치열한 전투의 무대였다. 서울의 아차산성, 하남의 이성산성, 화성의 당성, 오산의 독산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막말로 백제가 다스렸던 지역이 하루아침에 고구려로 바뀌고 그다음 날은 신라로 주인이 바뀌는 등 경기도 지역이 역사의 주연이 되기까지 수많은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혼란에 빠질 때 즈음 이곳 경기도를 기반으로 하는 인물이 드디어 등장했으니 우리가 아는 궁예가 바로 그 인물이다.
"누구인가? 지금 누가 기침 소리를 내었어?" "짐이 미륵이니라."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극을 이끌었던 주연은 왕건도 아닌 궁예다. 지금까지의 수많은 인물들과 달리 승려의 행색을 하며 애꾸눈의 괴이한 형태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한눈에서 뿜어 나오는 카리스마와 광기는 이전과 이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김영철 배우의 열연이 한몫을 했겠지만 궁예의 일생 자체가 한반도 5000년 역사에서 가히 독보적이라 사람들을 화면으로 빨아들였는지도 모른다. 그 드라마로 인해 궁예가 재조명되었지만 우리는 단지 그를 광인(狂人)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그는 단지 증오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일까?
▲ 칠장사 명부전에 남아있는 승려시절의 궁예모습 궁예는 칠장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영월에 자리한 세달사로 출가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세달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칠장사 명부전 벽화에는 승려시절의 궁예모습을 엿 볼수 있다.
918년 궁예는 왕건을 중심으로 한 패서 호족들에 의해서 쫓겨났지만 1000년이 지난 지금도 경기도 안성, 포천 일대에서는 궁예와 관련된 흔적, 설화가 두루 분포한다. 오히려 그의 수도였던 철원보다 진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한반도 중부 특히 경기도 일대에서 남아 있는 그의 흔적들을 천천히 거닐어 보기로 하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이미지의 궁예는 삼국사기의 궁예 열전을 통해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6장 남짓한 분량에 그의 생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 전체적인 모습은 피해망상에 가득한 복수귀의 화신으로 결국 미치광이가 전락하면서 왕건의 고려 건국을 정당화시키는 악역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역사의 패자는 아무 말이 없다곤 하지만 안성, 포천 등지에 남아있는 그의 설화와 미륵신앙들은 마냥 폭군이라 하기엔 의문이 드는 게 사실이다.
일단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따라가 보자. 궁예는 신라의 47대 왕 헌안왕의 서자로 태어났지만 하필 당시에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단옷날이었고,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자라 있었으며, 집 위로 하늘이 비치는 등의 여러 징조(또는 여러 가지 말 못 할 상황으로) 버려지는 운명을 맞았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눈 하나를 잃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유년을 보냈으리라 짐작된다. 왜 궁예는 왕족의 신분으로 버려지게 된 것일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헌안왕이 처한 상황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당시 신라는 8세기의 최전성기를 지나 귀족들의 부패와 내분으로 왕이 몇 년을 못 넘기고 숱하게 교체되는 경우가 잦았다. 헌안왕이 왕위를 물려받은 계기도 조카인 문성왕이 태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폐위하여 죽기 전 지목한 것이다.
▲ 신라 오소경의 위치 신라의 수도 서라벌이 동남쪽에 치우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오소경을 세웠다. 궁예는 오소경의 중간 지점인 죽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게다가 헌안왕의 제위기간은 4년뿐이라 마냥 치세가 순탄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그에게는 딸만 둘이었다. 결국 그는 사위인 응렴(경문왕)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한다. 그러던 와중 후궁에게 자식을 보았다고 하니 장차 분쟁의 소지가 크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아마도 후궁의 친가가 서원경(청주)인 만큼 진골 사회로 구성된 신라 사회에서 궁예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으리라고 본다.
아무튼 그를 구한 유모 밑에서 자란 궁예는 출생의 비밀을 듣고 세달사로 떠나 출가하여 선종이란 법명을 받게 된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언급했듯이 그가 출가한 세달사는 고려시대에 흥교사로 이름이 바뀌어 꽤 번창했지만 후에 폐사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곳의 위치를 두고 개경, 영주 등지에 있다는 설이 존재했지만 2012년 영월 흥원 분교에서 흥교라 써진 막새가 발견되면서 점차 이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현재 흥원 분교는 태화산 체험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 흥교라는 이름이 적힌 막세 세달사(흥교사)의 위치에 대해 개성, 영주 등 여러 설이 존재했지만 최근에 영월에서 발굴된 흥교라는 이름이 적힌 막새 덕분에 이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제 선종 스님이 된 궁예는 부처의 힘을 빌러 처지에 대한 울분을 토해내려고 했지만 그러기엔 그는 젊고 기골이 장대했다. 어느 날 우연히 재를 지내러 가는 도중 까마귀가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는데 왕(王) 자가 새겨진 상아로 만든 댓 조각이었던 설화로 미루어 보면 그는 야심 또한 남달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의 첫 무대는 다름 아닌 안성이었다. 그의 승려 시절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장소는 세달사로 출가하기 전 그가 유모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칠장사다. 안성의 동쪽에는 용인과 안성, 그리고 충청도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인 죽주는 삼남대로의 길목에 자리한다.
당시 신라의 5 소경이라 할 수 있는 서원경(청주),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모두 지근거리에 있었으니 궁예와 유모가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고, 칠장사가 있는 칠현산은 도둑이 들끓었다는 칠장사의 설화처럼 산세가 험하다. 그 칠장사의 명부전 벽화에는 궁예의 승려 시절 모습들을 짐작할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너른 터에서 궁예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마침 신라는 진성여왕이 다스리던 때였는데 이미 시기를 놓친 말기병 환자처럼 곳곳에서 반란과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았다. 농민이었던 원종과 애노의 반란은 그 시발점이었고 북원의 양길 무진주의 견훤 등 지방 각지에서 호족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신라의 권역은 서라벌 일대로 축소되고 만다.
마침 궁예의 유년기를 보냈던 죽주에도 기훤의 세력이 터를 잡았기에 그의 휘하로 들어가 야망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때가 바로 진성여왕 5년 891년이다. 죽주를 바라보는 비봉산 자락의 죽주산성으로 가서 궁예를 계속 알아가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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