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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민 Jan 03. 2022

여행을 따라가며 읽는 역사 인물 이야기 1화

이야기를 시작하며

경기 별곡 시리즈가 끝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독자들이 간혹 다음 시리즈에 대한 문의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필자 또한 강원도, 충청도, 경주를 저울질하며 다음 지역에 대한 답사를 차근차근 준비를 하는 중이다.

허나 경기 별곡 시리즈를 돌이켜 보니, 도시마다 서려있는 매력은 바로 스토리텔링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인공은 '인물'이다. 문득 시대순으로 재구성해, 장소마다 깃든 인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안성 칠장사에 그려진 궁예의 일생 한국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인물인 궁예는 이곳 안성 칠장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안성, 포천 일대에는 아직도 그 당시 만들어진 미륵불이 꽤나 남아있다.


경기도, 서울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그 중요성 덕분에 예로부터 그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고 온달장군, 개로왕 등 수많은 인물들의 목숨을 바치곤 했다. 하지만 신라 말에서 고려 초가 시작될 때 이 지방은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사의 가장 파란만장한 인물 궁예가 처음 동자승 시절을 보냈던 곳이 경기도 안성이고 이 지역은 후세까지 그가 외쳤던 미륵불 신앙이 성행했던 지역 중 하나다. 또한 철원 바로 아래에 자리 잡은 포천은 궁예의 든든한 밑바탕이었고, 쿠데타로 인해 쫓겨날 당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도시이기도 하다. 


              




▲ 연천 경순왕릉의 전경 경순왕릉은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고 고려에 귀부해 안락한 말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의 왕릉은 연천에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도 경기도에 묏자리를 잡았다. 신라를 온전히 왕건에게 바치고 귀부한 경순왕은 고려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어 개경에서 안락한 생활을 보냈다. 그는 죽은 뒤 경주에 묻히고 싶었지만 정치적인 배경 덕택에 개경에서 적당히 떨어진 연천에 마지막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이 지역과 함께 수많은 이야기와 흔적을 남겨놓았다. 대표적으로 이천 서씨의 대표 인물인 서희는 지금도 이천 곳곳에 그의 동상과 기념관 공원을 만들어 놓았다.

비슷한 예로 파주의 윤관 장군을 들 수 있다. 파평 윤씨의 대표 격인 그는 문인이었지만 강감찬 장군과 마찬가지로 전장을 누비며 무신으로 거듭났다. 파평 윤씨와 파주는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기에 그의 묘택을 살펴보며 파주와 파평 윤씨에 대해 알아가 보기로 하자.     

여말선초가 되면서 피폐했던 고려에 대한 개혁과 새나라 건국을 놓고 신진사대부는 온건, 급진으로 나뉘면서 대립하게 된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포은 정몽주와 조선의 기틀을 세운 정도전은 동지였지만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승부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이 건국된 이후 정도전은 숙청되면서 구한말에 비로소 복권되었지만 정몽주는 그를 죽인 이방원에 의해 만고의 충신으로 숭상되었다. 그 두 인물의 이야기가 경기도 평택, 용인에 깃들어 있다.    

이제 조선이 건국되었다. 그 수도가 지금의 서울이었던 만큼 경기도의 역사는 더욱 촘촘해진다. 특히 서울과 경기도 곳곳에는 왕실의 흔적들이 두루 분포한다. 궁궐은 물론 조선왕릉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유년기엔 함경도 변방의 군벌이었고, 아버지와 함께 고려조정에 귀순했다가 왕년기엔 고려를 구한 영웅이 되었고,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잡고 나선 왕의 자리에 올랐다가 만년엔 자식과 동반자를 잃고 한을 품은 태조 이성계, 그의 한은 여전히 무덤의 억새밭에 서려 있었다. 그의 야심찬 아들 태종 이방원은 어떤가? 그는 창덕궁을 세웠고, 내곡동의 헌릉이 그의 무덤이다.  


             




▲ 파주 반구정의 전경 조선 세종의 노회한 대신인 황희정승은 말년의 3년 동안 파주의 반구정에서 일생을 보내게 된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선하면 빠질 수 없는 게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구축했던 사대부들이다. 그들은 유교를 바탕으로 질서를 만들었으며 왕권을 견제하고 때로는 추월하기도 했던 강력한 신권을 바탕으로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만들었다. 그들의 선배라고 할 수 있는 황희 정승이 말년을 보냈던 반구정을 찾아가 그에 대해 고찰해보기로 하자.  

1592년이 되면 조선시대를 전, 후로 나누게 되는 임진왜란이 조선 팔도를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육지에는 의병들과 권율 장군이 있었다. 경기도 일대에는 권율 장군이 활약한 오산의 독산성과 고양의 행주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임진왜란의 기억이 뇌리에서 사라지기 전, 1636년 한국사의 가장 큰 치욕이라 불리는 병자호란의 무대가 바로 서울 근교에 자리한 남한산성 일대다. 이런 아픔을 뒤로하고 조선은 후기 사회로 접어들게 된다.     


             




▲ 한국사의 치욕의 장소 남한산성 인조는 한양에서 나와 이곳 남한산성에서 청을 상대로 항쟁을 펼쳤다. 하지만 굶주림과 포위에 지친 그들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루고 만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많은 개혁을 하게 되는데 영정법, 균역법과 함께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실행하면서 백성의 고통을 경감하려는 노력이 지속되었다. 그 중심에는 김육이 있었다. 그리고 오리 이원익 대감도 그중 하나였다. 단순한 도회지라 생각했던 광명의 주택가에 그의 종택이 남아있다. 거기서 그의 가풍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극의 가장 많은 소재로 사용되었던 숙종과 인현왕후 그리고 장희빈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세간의 이야깃거리로 삼는 것 중 하나다. 우연의 일치일지 모르지만 고양 서오릉 경내에 그들의 무덤이 전부 남아있다. 환국을 무대로 삼아 왕권을 휘둘렀던 숙종과 희생양인 그의 여인들을 한번 고찰해보는 시간도 가져보기로 한다.     

지리멸렬했던 예송논쟁도 지배층의 탐욕이 극도로 도달했던 세도정치의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변화를 위한 새싹이 슬금슬금 자라나고 있었다. 중농학파의 거두 성호 이익 선생과 조선의 레오나르드 다빈치라 불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사상의 성과는 정조대왕의 꿈 수원화성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유럽 제국주의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아시아 국가들을 향해 침략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됐다. 그때 당시 쇄국정책을 펼쳤던 흥선대원군의 굳센 의지가 강화와 김포 관방 유적지에 나타나 있다. 그가 살았던 운현궁, 석파정을 함께 돌아보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재 조명해보도록 하자.   

앞으로 시대 순으로 연재를 진행하며 경기도, 서울에 흩어져 있는 장소를 찾아가며 인물 하나하나를 필자의 시각으로 조명해 보려고 한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분은 물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또는 방학을 맞아 자식들에게 역사교육을 시켜주시려는 부모님들에게도 흥미 있는 새로운 시리즈가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화부터 인물을 따라가며 함께 역사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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