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일보 기고 9, 한국여행을 다시 생각하다.
기나긴 코로나의 터널을 지나 세계는 다시 여행의 시대를 맞이했다. 바르셀로나와 베네치아는 넘쳐나는 관광객에 도시가 몸살을 앓고 있고 결국 입장료를 부과하거나 관광세를 인상하는 등 강경책을 내놓고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떠한가.
2024년 2천872만명의 한국인이 해외로 떠났고 방한 외국인은 1천639만명에 그쳤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은 국가는 일본(880만명)이며 일본인 방한객은 322만명에 불과하다. 숫자만 봐도 방향성이 명확하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외국인의 77%가 서울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도쿄 36%, 후쿠오카 24%, 오사카 22% 등 전국적으로 관광 수요가 분산돼 있다.
요즘 일본 지방도시를 여행하면 폐점 직전이던 상점들이 한국인 관광객으로 다시 숨통을 틔우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최근 직항편이 열린 도쿠시마는 과거 시내 상점의 80%가 문을 닫았던 도시로 일본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프로모션과 인프라 정비를 통해 인근 다카마쓰, 마쓰야마로 수요가 확산되며 하나의 관광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처음에는 도쿄, 오사카 등 대도시로 우리의 눈길이 쏠렸지만 점차 소도시까지 일본 관광의 영역은 끊임없이 확장 중이다.
한국도 한때 전주, 여수처럼 유행을 타며 각광받은 도시들이 있었지만 천편일률적인 상점 구성과 특색 없는 먹거리, 과도한 호객행위 때문에 점점 이곳을 찾는 여행자는 줄고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지자체는 너나 할 것 없이 관광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한다. 경관 좋은 곳엔 어김없이 출렁다리와 케이블카가 생기고 사계절 내내 축제가 열리며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간판과 조형물이 거리를 수놓는다. 그러나 이내 다른 지역에서 더 큰 규모로 더 화려하게 만든 콘텐츠들이 등장하면서 금세 잊혀지고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어떤 프로젝트는 지자체장의 임기와 함께 등장했다가 정권 교체와 함께 소리 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지도를 펼쳐 보면 대부분의 관광지는 도시 외곽에 있다. 정작 고장의 중심지인 구도심은 상점의 절반 이상이 비어 있고 딱히 머물 이유를 찾기 어렵다. 당일치기로 찾아온 관광객은 중심지를 스쳐 지나가고 젊은 뚜벅이 여행자는 다음 교통편을 찾느라 분주하다. 유럽이나 일본, 중국 등 관광 선진국은 구도심과 근교 명소 간의 시너지 구조를 구축해 체류형 관광을 유도하는 데 반해 한국은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가는 반나절 여행이 주를 이뤘다. 여행자들에게 그 고장에 대한 이미지는 스쳐 지나가는 신기루나 다름없을 것이다.
혹자는 산업화와 전쟁으로 구도심이 파괴돼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은 사라진 거리를 복원하고 가장 번성했던 시기를 테마로 도시를 재구성해 관광 자원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관광객은 거리마다 이어진 가게에서 지역 특산물을 손에 들고 다니며 쇼핑을 즐긴다. 밤이 되면 아름다운 조명과 야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광장이나 무대에서 열리는 지역주민들의 공연을 관람하며 지역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남긴다.
우리도 변화의 조짐은 있다. 일과 휴식을 병행하는 워케이션을 유치하고 강진, 해남, 영암처럼 지역 간 협력을 통해 콘텐츠를 보완하거나 숙박객에게 입장료를 할인해주는 시범사업도 등장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단기적 이벤트에 머물고 퍼주거나 할인 위주의 정책에만 몰려 있어 큰 효과는 보지 못했다. 정작 지역 정체성과 연결된 기획이나 장기적인 대책은 부족하다.
이제는 비슷한 출렁다리나 조형물 하나 세워두는 것으로 관광이 된다고 믿는 시대는 지났다. 포천에 주막풍의 막걸리 마을이 들어서고 동두천의 국제거리가 ‘록의 거리’로 부활하는 상상을 해본다. 한국 관광의 미래는 사람을 스쳐 지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살아보게 만드는 데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