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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 Mar 05. 2022

봄날은 온다

어제, 그리고 오늘, 나를 쓰다

   봄은 지났다. 이제 평균 수명은 100세가 될 거라며, 100세 시대라고 한다. 100세를 기준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보자면, 스물다섯까지가 봄이다. 내 나이는 이미 벌써 꽃피는 봄은 지났다. 뒤늦은 봄에 피는 꽃도 이미 다 저물고, 무더위가 극성인 7월 말에서 8월 초인 셈이다.


   2월생이라 학교를 일찍 들어갔다는 이유로 나는 조금씩 시간을 벌어둔 기분이었다. 상황에 따라서 나는 같은 학년 친구들과 나이가 같다고 우기기도 했고, 또 다른 일이 생기면, 원래 나이로 한 살 낮춰서 부르곤 했다. 그렇기에 나의 스무 살은 2년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스무 살, 그리고 그다음 해, 내 나이로 정말 스무 살이 되었을 때도, 스무 살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나의 서른 맞이는 좀 더 길었다. 내 친구들이 서른이라 할 때도 나는 아직 스물아홉이라 했고, 내 나이로 서른이 되었을 때도, 만 나이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나이로 스물아홉이라 우겼다. 아홉수라며 좋지 않다 해도, 차라리 그게 낫다며 나는 앞자리가 3으로 바뀌어 싫다고 버티고 버텼다. 반올림으로 서른과 가까운 나이대만 하더라도 나이를 기억하곤 했는데, 반올림으로 이젠 서른이 아니라 마흔과 가깝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나는 내 나이를 잊었다. 누군가 내 나이를 물으면 나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계산을 해서 대답한다. 몇 번 대답하고 나면 기억할 법한데, 나는 누군가 물어볼 때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다시 계산한다. 내 나이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나의 무의식과 의식이 만들어낸 합작품으로 나는 내 나이를 완전히 잊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내 나이도 잊고 살아'라고 할 때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떻게 나이를 잊을 수가 있는 것인지, 그냥 하는 어른들만의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나이를 모른다. 우리 집 아이들 나이는 개월 수까지 따져가며 기억할 정도였고, 어쩌다 보는 남의 집 아이까지도 나이를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내 나이는 잊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가 맞을 것이다.


   나이를 잊긴 잊었어도, 서점가에 가면 '마흔'이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서른 즈음에 '서른'이라는 이름의 책에 한창 꽂혔던 것 같은데, 이젠 서른이 아니라, '마흔'이라는 책에 자꾸만 눈이 간다. 그런 책들은 사도 집 밖에서는 꺼내본 적이 없다. '내 나이 벌써 마흔에 가까워요'라고 광고하는 것 같은 마음에 나는 집안에 꽁꽁 숨겨두었다.


   봄이 가는 아쉬움에 지난 봄날만 생각하다 내 인생 나이는 이미 한여름에 들어섰다. 한여름에 들어섰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아직도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서 봄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있는 줄 알았다. 구석구석 찾다 보면, 어딘가에는 봄에 떨어진 꽃잎이라도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꽃잎은 이미 여름 장마와 함께 다 쓸려가고 이젠 없다. 내 인생 봄날에 아름답고 화려한 꽃을 피우지도 못했고 하다못해 작은 안개꽃조차 되지 못했다. 가을날에라도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봉우리를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아직 내게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다. 가을날에도 꽃을 피우지 못한 채로 겨울 맞아 아무 열매도, 꽃도 맺지 못한 채 사그라질까 두렵기도 하다.


   꼭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만, 가을에 맛있는 열매를 맺어야만 성공한 인생일까. 빼빼한 나뭇가지뿐이지만, 그 자리에 없으면 허전한 것처럼, '그 자리를 지킨다'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 거리에 앙상한 가지만 자리 잡고 있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있어서 도시는 덜 삭막해 보이는지도 모른다. 있을 때는 그 존재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없으면 어딘가 어색하고 허한 것처럼 말이다.


   내 인생에 봄은 이미 지나갔지만, 아직 2022년의 봄은 오지 않았다.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는 동안,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봄날은 지나갈 것이다. 거리에 흩날리는 벚꽃을 바라보고 초록 빛깔 잔치가 열리는 여름 지나 추수의 계절에 수확하는 열매를 맛보고 겨울날 앙상한 가지에 하얀 눈이 뒤덮인 모습을 수 십 번은 더 봐야 내 인생에도 겨울은 올 것이다. 수없이 많은 봄을 만나다 보면, 어느 날 때가 되면 피어나는 꽃잎처럼, 열매처럼, 내 마음에도 봄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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