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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선 May 16. 2024

남편이 전여친에게 쓴 편지를 발견했다

그 X들에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봉규가 잠시 밖에 나간 어느 오후, 혼자 있던 그날은 작은방을 둘러보다 책장 한쪽의 일기칸에 눈이 갔다. 내가 봉규를 짝사랑했을 때 썼던 일기와 봉규가 나를 짝사랑했을 때 쓴 일기들이 꽂혀있는 칸. 그중에서도 평소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파란색 가죽 공책이 유독 걸렸다. 이런 게 있었나? 두께와 크기를 보아하니 다이어리였다. 앞쪽의 월별 일정을 훌쩍 넘기고 메모칸 첫 장을 펼쳐보니 2박 3일의 휴가를 다녀왔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호, 군인 시절에 썼구만.


  잠깐만, 이때라면... 봉규가 연상의 그녀와 만났을 시기인데. 페이지를 빠르게 탐독하기 시작했다. 봉규가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하지만 넘기고 넘겨도 연애사를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여기에 연애 얘기를 쓰지는 않은 건가. 첫 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다시 꼼꼼히 확인했지만 그녀의 흔적은 찾지 못했다. 아쉽긴 하지만 봉규가 오랜만에 읽어보면 재밌어할 것 같아 얌전히 거실 협탁에 놓아두었다.


  돌아온 남편은 다이어리에 표시한 날짜를 짚어가며 군대에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신나게 얘기해 줬다. 보초설 때 제기를 차다가 다른 부대 대대장에게 걸려 말년 휴가가 잘렸던 치욕, 중대장의 지시로 다목적실의 중대원들 앞에서 췄던 별빛달빛, 위병소 앞에서 3주 먼저 전역하는 동기를 향해 경례하고 품에 안겨 흘렸던 뜨거운 눈물, 깜짝 파티로 부사관과 후임들이 준비해 준 생일케익 등등...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즈음, 봉규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일어났다. 돌아온 봉규의 손에는 또 한 권의 다이어리가 들려있었다. 파란 다이어리 바로 옆에 꽂혀 있던 <꿈쟁이 다이어리>. 나는 책등에 인쇄된 해맑은 판다 캐릭터, 연두색 배경에 <꿈쟁이 다이어리>라는 제목이 주는 순박함에 속아 ‘진짜’가 들어 있는 자료를 눈앞에 두고도 넘겨버렸던 것이다.


  흥분을 감추기 위해 평범한 호기심의 표정을 최대한 유지하며 다이어리를 펼쳐보려 했으나 봉규는 약 15도 각도로 다이어리를 펼쳤다(그걸 펼쳤다고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약간 벌렸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고는 얼굴에 최대한 가까이에 대고 유심히 읽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나와는 살짝 떨어져서.


  기나긴 회유와(괜찮겠어? 응~ 괜찮아, 줘 봐) 설득과(마음이 별로 좋지 않을 텐데… 아니, 정말 괜찮아!) 호언장담(진짜? 진짜 약속할 수 있어? 달라고.)의 끝에 그는 다이어리를 내게 넘겼고, 그곳은… 노다지였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왜 이리 아련한 점점점이 많은지.


보고 싶다... 그립다... 아직도 많이...
그렇지만 예전과는 다르다.
이젠 그때처럼 흔들리고 요동치지 않을거다.
그날이 올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다 보면...

- 신봉규, 꿈쟁이 다이어리, 2011년 6월 25일
*글쓴이의 동의를 얻어 발췌하였음을 밝힘


이러면 안 되는데... 나만 힘들어지는데...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알면서도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거 일수도...

- 같은 일기, 2011년 6월 4일
*원작자의 동의를 얻어 발췌하였음을 밝힘


  알고 보니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을 때는 이말상초, 그녀ㄴ는(키판이 미끄러졌다) 이별을 통보했고. 봉규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정리하기 위해 글을 적었던 것이다. 흘려 쓴 문장들에는 생각해 보자는 그녀ㄴ 아니 그녀의 말이 정말 순수한 ‘생각’일 거라 믿고 싶어 하는 군인 봉규의 애환과 결국 헤어짐을 받아들여야 했던 절절한 미련이 가득 담겨 있었다. 호기심 반 놀릴 생각 반으로 탈취한 다이어리였지만 찬찬히 읽다 보니 울컥했다. 나보다도 한참 어린 스물한 살짜리  봉규가 안쓰러워서.


  김광진의 노래 <편지>의 가사도 본인이 아니라 아내의 전 연인이 준 편지를 토대로 썼다고 하던데. 어떻게 아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이별 편지로 노래를 쓸 생각을 하지?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지만 지금은 어떤 마음인지 어어어렴풋이 알겠다. 그 사랑을 지나온 네 시절도 소중해서 남겨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그날 밤 자기 전에 나도 봉규에게 나의 X얘기를 해줬다.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헤어졌는지. 남편 봉규는 ㅡ그 시절을 지나ㅡ 내게 와줘서 고마워,라고 말해줬다. 언젠가 그 X들도 이 글을 읽게 될까? 그들 또한 결혼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니까 배우자들과 함께 읽을 수도 있겠지. 어쨌든 지금은 그들에게 감사하다. 그 시절 그들이 있기에 지금의 봉규 희선이 있는 거니까, 는 아니고. 다음 사랑의 순서가 우리 서로가 될 수 있도록 오래오래 연애하지 않고 헤어져준 게 제일 고맙다. 그 X들이 어떻게 사는지 나도 모르고 봉규도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 둘이 더 잘 살고 있지 않을까? 안 그래?


  봉규가 보여준 다이어리를 다 읽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이어리 끝에 꼽아둔, 그녀를 향한 못 부친 편지는 숨겨 달라고 했다. 다시 책장의 일기칸이 문득 눈에 띄는 그날에 나도 모르게, 나의 손이 봉규의 추억을 아차차, 하고 갈가리 찢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전남친한테 받은 편지는 헤어진 바로 그날 두 갈래로 박박 찢어버렸다는 말도 친절히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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