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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다는 것

보는 것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라디오 PD로 살아남는다는 것

by 해이나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심지어 꿈에서조차 우리는 듣는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거리의 소음들, 다양한 물체들이 내고 있는, 그리고 내가 내고 있는 소리들.

소리를 들으며 우리는 느끼고, 생각한다.


보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

사실 듣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보는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켜면 나에게 닿는 수많은 것들 대부분이 보이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휙휙 지나가는 쇼츠와 릴스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들.

스마트폰을 벗어나더라도 우리의 삶은 보는 것들로 가득 차있다.

우리는 글을 읽고 사진을 보고 영상을 즐기며 하늘을 바라본다.

길가에 핀 꽃들을 바라보며 웃고, 특이한 구름을 발견하고 행복해하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정을 얻는다.


이런 세상에서 듣는다는 행위는 어쩌면 조금 뒤처진 어떤 것으로 느껴질지 모르겠다.


심지어 나는 라디오 PD다.

라디오의 위기는 대학시절 언론학을 배우던 시절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에 라디오와 함께 잠들었던 많은 이들은 이제 라디오를 듣지 않는다.

대신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본다.


사양산업.

사람들은 라디오방송을 이렇게 말하곤 한다. 재난이 일어났을 때나 의미가 있는 매체라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라디오를 제작하며 많은 것들을 듣고 많은 것들을 듣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듣는 행위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듣는 사람.

듣는 행위.

듣는 것은 보는 것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라디오에서 들려온 어떤 노래에 문득 감상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전파로 전달되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와 이야기에 위안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아니 혹은,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무언가를 느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함께 해주었으면 싶다.



라디오 PD는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직업이다.

듣기 좋은 음악을 선곡하고, 들을 만한 사람들의 사연을 골라내고, 들으면 도움이 되는 이야기들을 작가님과 구성해 낸다.

사람들은 매일 같은 시간, 내가 구성해 낸 이야기들을 듣고 또 새로운 이야기를 문자로 보내며 화답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다시 전파를 탄다.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세상에 들려오는 것이다.


사실 처음 라디오 PD가 됐을 때에는, 이렇게 ’보는 것‘들로 가득 찬 세상에 ’듣는 것‘으로만 말하는 이 일이 과연

얼만큼 계속될 수 있을까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라디오와 함께 한지 약 10년이라는 세월을 앞두고,

나는 이제 ‘듣는 것’으로만 말하는 이 일이,

이 세상에 큰 의미가 있노라고 단언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듣는다는 행위는 따뜻하다.

세상에는 따뜻함이 필요하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듣는 행위가 필요하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들을, 많은 소리들을, 많은 것들을 들을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세상이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다이얼을 돌려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를 듣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스마트폰 앱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전 세계에서 라디오를 들을 수 있는 시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큰 흥행을 하진 못했으나, 먼 나라에서는 팟캐스트가 많은 이들의 고민을 달래주고 있고,

전 세계인들은 같은 음악을 들으며 행복을 느낀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듣는다 ‘는 행위의 중요성이 더욱 중요해진 시대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듣자, 듣자.

우리는 들어야 한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앞으로의 글들은

나의 라디오 PD로써의 커리어의 기록이자,

듣는 한 사람으로서의 일기장이자,

더 많은 사람들이 ‘듣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호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글들이 나올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듣는 이야기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


이 글은

내가 들은 것들, 들려주고 싶은 것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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