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 폴리 아 되>
조커 : 폴리 아 되(Folie a Deux)
폭발적 광기의 조커를 기대했던 관객들에 대한 의도적 배신과 이를 통해 전달하려는 방향 잃은 분노와 폭력의 종착점.
1.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 영화
제목부터가 낯설다. 그리고 그 낯섦에 감독이 말하려는 주제 의식이 녹아있는 동시에 할리퀸이라는 캐릭터와 제목 자체가 완벽한 미끼였다.
제목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2인 정신병 : 가족 등 밀접한 두 사람이 동일하거나 유사하게 앓는 정신병,
② 감응성 정신병
감독은 아마도 의도적으로 할리퀸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사람들에게 1의 의미에서 작품을 기대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고편에서부터 조커 2편은 기존 할리퀸의 이미지를 더 강화할만한 가수 겸 배우인 레이디 가가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전편에서 보여준 광기의 조커 탄생에 이어 그러한 광기를 공유하는 강렬한 조커의 추종자로 묘사되어 온 할리퀸의 등장을 예고하며 두 광인들이 보여줄 폭력과 혼돈의 시너지를 기대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2편의 결과물은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나서며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기대를 배반한 감독을 규탄하거나 작품을 호평한 평론가들을 ‘예술가 병’에 걸린 것으로 취급하며 비난하기에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감독은 조커 1편의 서사에서 아서 플렉이라는 선량한 개인이 사회의 집요한 악의와 폭력을 겪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약자 내면의 분노가 어떻게 폭발될 수 있는지를 조커라는 상징으로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조커의 탄생과 조커를 추종하는 세력들의 광기를 통해 그 분노와 폭력이 어떻게 공유되고 확산될 수 있는지를 관객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했던 것이다. 또한 전편의 결말에서는 이러한 강렬한 조커의 이미지를 홀로 남겨진 부르스 웨인과 대조시켜 선명하게 각인시키며 그가 이후 서사에서 보여줄 더 큰 광기를 기대하도록 만든 부분도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2편의 서사는 갓 탄생한 정점의 조커가 보여줄 광기의 소용돌이를 누구나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기대를 배반함으로서 조커의 서사가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조커 2편은 감독이 의도한 모든 것이 실현된 높은 완성도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감독이 관객에게 말하고자 하는 폴리 아 되 현상은 조커와 할리퀸의 교감으로 인한 광기의 확대,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 영화 속 대중의 분노만을 나타낸 제목이 아니었다. 영화는 이를 넘어서서 조커라는 영화에서 보여줄 폭력과 혼돈, 파괴를 기대하는 관객들의 욕망이나 욕구까지도 제목을 통해 비판적으로 꼬집은 것은 아니었을까.
2.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줘라! - 대중 상업 영화의 길
천만 관객의 영화가 주는 쾌감은 아마도 대중이 원하는 것을 주기 때문에 그러한 반향이 있는 것은 아닐까, 대중 상업 영화의 목적이 돈이라면 관객이 가장 시원해하거나 그들이 가장 기대하는 바를 적절히 구성해서 영화를 만드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이다 같은 이야기는 잠깐의 갈증을 풀어주는 오락이 될 수 있을지언정 영화사에 남을만한 명작이라고 평가하기에는 너무도 빈곤하다. 빈곤함을 넘어서서 그런 영화들은 오히려 현실에서 가져야 할 문제의식을 희석시키며 울고 웃는 과정 속에서 잠깐의 위로나 쾌감만을 전달한 채 영화 속 현실과는 달리 그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사회 속으로 우리를 다시 밀어넣는다.
물론 잠시의 위안이나 쾌감도 무가치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가 힘든 삶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예술로서의 가치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작품들이란 내 삶이나 내 주변의 세계를 보다 명징하게 인식하게 하고 우리가 느끼는 현실의 부조리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깨달음을 주며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 질 수 있는가를 고민하게 하는 작품 아닐까?
영화 한 편을 보는데 뭐 그리 심각하고 불편하게 많은 고민을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가졌다면 단순한 오락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씩 한번 쯤은 우리 삶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을 하게 하는 예술작품에서도 오락 영화 못지 않는 쾌감을 느끼기도 하지 않는가. 현실의 문제를 잠시 잊고 두 시간 정도를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도 좋지만, 보는 과정이 힘들지라도 묵직한 울림으로 삶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고,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게 만들며,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게 만드는 작품들이 더 의미 있고 좋은 작품이 아닐까하는 개인적 생각은 크게 양보할 마음이 없다.
이런 면에서 조커 – 폴리 아 되는 조커와 할리퀸의 광기가 증폭되어 대중의 지지를 얻는 과정에서 썩어가는 고담시가 불타는 광경을 목격하며 파괴의 즐거움을 누리고자 기대한 관객을 좌절하게 만든다. 영화는 관객이 보기에 즐거운 서사가 아니며 오히려 불편하고 힘든 장면이 더 많다. 그렇다고 더 시원한 나중의 쾌감을 위해 답답한 고구마를 강제로 먹이다가 결정적인 한 방을 터뜨리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두 가지 방식으로 관객에게 고구마를 던져줄 뿐이다.
그 첫 번째 서사는 정점으로 탄생된 조커와 아서 플렉을 분리시키고 1편부터 그 누군가라도 좋으니 선량한 얼굴로 자신을 보듬어주며 구원해 주기를 기대한 아서 플렉을 집요하게 좌절시키는 서사이며, 두 번 째 서사는 조커로 상징화 된 대중의 분노와 폭력성이 방향을 잃었을 때 어떤 비극이 탄생될 수 있는지를 고통스럽고 힘든 방식으로 보여주는 서사이다. 두 서사는 애초에 아서 플렉이라는 선량한 인간과 그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억압받는 자의 분노를 상징하는 조커가 동전의 양면과 같은 한 인물의 이중적 자아이기에 결말에서 하나로 합쳐지며 완벽한 서사를 완성한다. 그리고 개인의 내면에 있는 그 양면성이 어떻게 표출될 수 있는가는 개인의 기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을 둘러싼 사회가 개인을 대하는 방식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게 만든다.
영화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직시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울림을 주고 아서 플렉이라는 선량한 자의 정체성보다 분노로 탄생된 폭력과 광기의 조커라는 정체성에 동질감을 느끼며 쾌감을 기대한 관객에게는 실망감을 준다. 감독은 실망한 관객들에게 사회를 고담처럼 만드는 공유정신병적 장애는 영화 속 인물뿐만 아니라 관객 모두가 앓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객 모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조커 2편은 대중들이 원하는 것을 주기는커녕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며 주제를 완성시키는 방식을 선택했기에 관객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이러한 감독의 무례함에 분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3. 아서와 조커 사이의 갈등, 그리고 조커의 분열
시작부터 영화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아서와 조커라는 두 내면의 인격을 분리시켜 아서는 실체로, 조커는 그림자로 묘사하며 등장하게 한다. 그림자인 조커는 규범과 질서를 모두 벗어던진 모습으로 거침없이 행동하지만 그 거침없는 행동의 결과는 모두 그림자의 실체인 아서가 당하는 모습에서 이 프롤로그는 전체의 이중적인 구조를 규정하며 아서의 운명을 암시한다.
이후 현실에서 아서는 1편의 마지막에서 각성한 강렬한 조커의 모습이 아닌 힘없고 초라한 수감자인 아서 플렉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회의 집요한 폭력과 악의는 교도소라는 장소로만 변경되었을 뿐 간수들이 보여주는 폭력과 조롱의 태도는 아서의 삶이 사회에서나 교도소에서나 달라진 게 없음을 보여준다. 아서는 대중의 자신에 대한 지지마저도 알 수 없도록 철저히 고립된 상태로 정신병적 문제를 가진 죄수들이 수감되는 교도소에서 비참한 생활을 한다. 1편의 결말 부분에 묘사된 경쾌해 보이기까지 하는 폭력적 자아인 조커와 달리 그는 웃음기와 농담마저 잃은 채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모습이다.
이러한 시작 장면에서부터 영화의 방향은 정해졌다고 볼 수 있다. 거대한 계획으로 고담을 뒤집으려는 야심가로서의 조커가 아닌 거대한 사회의 폭력으로부터 희생된 보잘 것 없는 개인인 아서에 영화는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위대한 악당 조커가 할리 퀸을 만나 광기의 시너지로 썩어가는 고담시를 파괴하며 관객들에게 쾌감을 선사하는 진부한 오락영화의 길을 걷는 것을 거부한다. 흥행적인 면에서 더 유리할 수 있는 이러한 서사의 유혹을 떨쳐내고 영화는 진지한 시선으로 이렇게 쌓인 분노와 광기의 폭력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혁명을 이루어내기보다는 혼돈 속에서 모두를 고통받게 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1편에서 이미 충분히 조커의 탄생이라는 절정을 통해 세상을 파괴하고 싶은 약자들의 분노는 충분히 보여주었기에 광기와 폭력의 무의미한 반복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보다는 아서의 나머지 반쪽에 주목하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적 현실의 원인을 찾는 동시에 인간은 그런 현실에서 만들어진 분노로부터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런 점에서 조커 1편에서부터 보여준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다른 영화 속 조커들과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된다. 호이킨 피닉스의 조커는 군중의 지지와 환호 속에서도 언제나 외로워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아서라는 개인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바가 혼돈과 파괴의 광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서 플렉의 절망과 고독은 아무리 선량하게 살고자 해도 사회적 약자라는 이유로 개인을 가만두지 않는 가학적이고 폭력적 현실에 상처 입은 영혼이 느끼는 절망과 고독이며 조커는 그러한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파괴의 열망인 것이다. 그를 지지하는 군중조차 이러한 그의 깊은 고독을 진정으로 이해하며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폭력의 경박함은 아서의 짙은 절망감에서 오는 파괴의 본능과는 다르다. 아서의 조커가 저지른 폭력에는 극단의 상황에 몰린 약자의 분노가 존재하지만 대중의 방화, 약탈, 그리고 토마스 웨인 부부의 죽음이라는 막연한 미움으로 저지르는 살인과 같은 폭력은 아서처럼 깊은 절망에 닿아 있지는 않다. 애초에 그들이 지지하는 조커라는 상징적 이미지는 반사회적이라는 면에서만 공통점이 있을 뿐 아서 플렉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만 고독해 보이는 것이다.
1편에서 아서는 그 집요한 약자에 대한 폭력 앞에서도 선량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고 미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삶을 살면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해줄 것이라는 희망과 상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웃집 싱글맘과의 관계나 아버지이기를 기대했던 토마스 웨인, 심지어 자신을 모욕한 머레이에게까지도 아서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모습을 상상하거나 최소한의 상냥함으로 자신을 구원해주길 바라는 태도를 보인다. 자신의 자살로 끝을 장식하려했던 머레이 쇼의 출연에서조차 자신을 모욕했음에도 출연 전까지 머레이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보내는 모습은 절망속에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싶은 아서의 심정을 보여주는 듯 하여 관객들에게 더 큰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물론 그 모든 것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마지막 기대마저도 배반을 당해 머레이를 죽이며 결국 조커라는 상징이 완성되지만 그것은 아서 개인이 원한 모습은 아니었다. 인간이 가진 최소한의 선량함에 대한 기대를 버린 순간 조커는 완성되었지만 아서는 파괴된 것이다.
1편이 조커의 완성을 그렸다면 이런 면에서 2편의 시작에서 무기력한 아서의 모습은 아서가 파괴되어 가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가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동전의 양면 중 하나인 조커의 가능성을 닫아놓은 것은 아니다. 리 퀸젤은 아서 내면의 조커에게 동경과 추앙의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여 끊임없이 그를 이끌어내려 노력한다.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제스쳐는 아서가 겪은 세상과 자기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싶은 절망감의 표현이었고 아서의 상상속에서 이웃집 여성이 이런 제스쳐를 따라하는 장면은 아서가 타인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소망을 드러낸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서의 상상 속 존재가 리 퀸젤이라는 현실의 인물로 아서 앞에 등장했던 것이다. 끊임없이 아서와 조커를 별개의 인격이라고 주장하며 아서의 살인이 어릴 적부터 학대받고 사회적 약자로 고통받은 그가 만들어낸 조커의 짓이기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변호사나 상담사는 비록 아서를 변호하려는 목적이지만 진정으로 아서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아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살인이라는 결과만 보고 그 과정에서 아서 개인이 겪은 부조리에는 관심이 없이 아서를 전기의자로 보내지 못해 안달이 난 하비 덴트와 군중들의 정의감이 반쪽짜리 정의감이듯 온전한 아서를 보지 않고 아서 내면의 조커를 별개의 인격체인 것처럼 이야기하며 그것이 단지 개인이 겪은 불행한 삶 때문에 발생한 정신분열적 증상인 것처럼 판단하려는 변호인의 태도도 반쪽짜리 이해인 것이다.
아서와 아서 내면의 조커에 대해 그 누구도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가슴에 품은 독기마저 사라져가며 절망으로 침잠하는 그에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는 듯한 리 퀸젤의 등장은 아서를 절망에서 구원한다. 리 퀸젤의 등장은 아서를 고담시 전체를 파괴로 몰아넣을 광기의 우상인 조커로 만들 수도 있고 깊은 절망을 이해받았기에 구원된 한 행복한 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다. 단 그 전제는 리 퀸젤이 아서를 온전히 이해했을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아서는 리와의 만남 이후 리가 온전한 자신을 이해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기에 웃음과 농담을 되찾기도 한다.
그러나 리가 매료된 것은 온전한 아서가 아닌 자신의 반쪽인 조커라는 것을 아서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정 공방 과정에서 아서는 리가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을 속인 사실을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된다. 가정폭력범이라던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녀는 정신 심리학을 전공한 고학력자에 부유한 집안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리와의 면회에서 거짓을 확인하고도 리가 임신했다는 말에 리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감정을 확신하게 된다. 이는 리가 면회실 유리창에 립스틱으로 그린 조커의 웃음 짓는 입술에 아서의 웃음이 겹쳐지는 장면을 통해 연출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이후 아서가 보여주는 조커의 모습은 자신 내면의 존재라기보다는 리가 사랑한 조커를 연기하는 아서에 가깝다.
재판의 두 번째 증인으로 등장한 이웃집 여성 소피의 증언으로 그의 망상과 치부가 낱낱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아서는 다시 조커로 각성하는 듯한 망상 속에서 변호사를 해고하고 조커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의 조커는 1편의 강렬한 위압감을 가진 조커가 아닌 어릿광대를 연기하는 아서의 조커처럼 느껴진다. 또한 리 퀸젤이 조커 분장을 해 주는 장면은 이후의 조커가 아서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조커가 아닌 리 퀸젤에 의해 만들어진 조커라는 이미지를 강화시키기도 한다. 비록 그 과정에서 변호인들이 대변하지 못했던 자신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의를 강하게 표출하기도 하지만 1편 마지막에 각성했던 조커의 모습은 아니다.
이는 아서가 마지막 증인으로 출석한 난장이 개리의 증언을 듣는 과정에서 잘 드러난다. 아서는 조커가 정신병적 증세가 아니며 주변의 악의가 만들어 낸 진짜 자신의 모습임을 강변하지만 결국은 변론을 포기하게 된다. 그 이유는 개리는 아서만큼이나 낮은 위치의 사회적 약자였고 6명의 악인에 대한 처단이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조커로서 개리에게 상처입힌 사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또다른 폭력이었음을 변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조커로서의 자기반성이 아닌 아서라는 선량한 개인으로서의 자기반성적 태도인 것이다. 아서는 개리 앞에서 조커의 모습을 하고 법정에 선 자신의 모습이 진정한 자신이 아님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아서가 자신 내면의 조커를 선망한 리 퀸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낸 조커가 진정한 자신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에서 개리와 함께 아서를 추종하다가 감옥 안에서 린치를 당해서 죽게 되는 리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서의 조커가 죽인 6명의 사람들은 아서에게 있어서는 동정의 여지가 없는 악의가 가득했던 죽어 마땅한 자들이었지만 개리와 리키는 아서 자신과 같은 죄 없는 사회적 약자였고 조커의 존재 때문에 폭력에 희생된 피해자였던 것이다. 비록 아서가 개리나 리키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가해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아서는 조커라는 분노의 파편이 분노의 대상이 아닌 그와 상관없는 이들에게까지 상처를 입힐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의 최소한의 선량함에 대한 믿음을 져버려 조커가 탄생했지만 선량한 아서를 기억하는 개리가 느끼는 괴로움이나 아서에게 가해지는 불의의 폭력에 반대하여 아서를 지지한 리키의 죽음은 아서가 조커로만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불어 리의 임신은 지금까지는 분노와 절망의 감정밖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서가 새롭게 희망의 감정을 품게 되는 계기였기에 아서가 분노와 절망에서 잉태된 조커로만 존재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어디에도 존재한다던 조커를 아서 스스로 진지하게 조커는 없다고 법정에서 선언하는 장면은 아서 내면의 조커가 붕괴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조커에 의해 파괴된 아서가 다시 아서로의 복귀와 회복을 원하지만 사회의 현실은 조커였던 그에게만 의미를 부여할 뿐 아무도 아서 플렉에게는 관심이 없기에 비극적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고 온전히 자신을 이해했다고 믿던 리에게서조차 아서는 버림을 받는다. 아서는 리가 사랑한 것이 온전한 자신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조커라는 환상이었음을 알게 되고 다시 모든 희망을 잃은 초라한 수감자 아서로 되돌아가게 된다.
이후 누군가 면회를 왔다는 소식에 아서는 면회장으로 가던 중 어떤 사이코패스 수감자의 손에 죽게 된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자신이 머레이에게 말했던 대사를 그대로 듣게 된다. 이는 아서가 아닌 또 다른 수많은 조커 중 하나의 탄생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아서의 조커와 달리 아서를 시작으로 한 앞으로 탄생 될 수많은 조커는 그 수만큼이나 다양하고도 무의미한 이유에서 발생한 분노와 광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조커라는 분노와 폭력의 광기는 그 방향성을 알 수 없으며 그것이 초래할 비극의 방향성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4. 우리는 누구에게,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처음부터 조커를 기대한 관객에게 감독은 아서 플렉을 던져놓는다. 그리고 다시 아서 플렉의 조커가 아닌 또 다른 조커를 제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런 점에서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는 조커에게 주목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서 플렉에게 주목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조커의 분노에 주목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서 플렉의 선량함에 주목해야 하는가.
그런데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그 방향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아서 플렉은 하나의 가능성일 뿐 그를 조커와 아서로 나눌 수 있는 힘은 우리의 그에 대한 시선에 있는 것 아닐까? 우리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과 그들이 벌인 사건 사고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 결과만 보고 하비 덴트와 군중들처럼 아서와 같은 사람들을 비난하고 지탄하는 데 앞장섰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정의감일 뿐이며, 아서의 상담사나 변호인처럼 개인의 정신병적 문제로 생각하여 동정했다면 반쪽짜리 이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사회가 억눌린 분노에 의한 폭력의 광기에 휩싸인 고담시가 될지 아니면 그보다는 나은 사회가 될 지는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살펴볼 수 있는 따스한 시선이 우리에게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의 변화는 더 늦지 말아야 한다. 그 이유는 아서 플렉의 조커는 우리의 노력과 변화로 막을 수 있지만, 그의 조커에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탄생할 수많은 조커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혼돈과 폭력의 광기로 우리 사회를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스스로의 시선은 어땠는지를 주목하고 변화하기를 바라는 영화가 아닐까. 그리하여 분노와 폭력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공유정신병적 증상으로 우리가 우리 사회를 스스로의 손으로 고담처럼 만드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경계하는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을 때 이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