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1 - 아서 플렉 내면의 억압받는 약자의 불꽃인 조커가 보여주는 폭력
조커1 - 아서 플렉 내면의 억압받는 약자의 불꽃인 조커가 보여주는 폭력의 광기.
1. 우리는 왜 폭력적 영웅에 열광하는가
어릴 적부터 디씨 코믹스의 인기작이었던 배트맨 시리즈에서 고담시의 암울한 분위기는 배트맨 시리즈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어둠과 혼란, 폭력이 난무하는 현실을 그 분위기만으로도 설득력을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한 고담시에서는 엄청난 재력가인 웨인 가문조차 그러한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부르스 웨인의 부모조차 고담의 어둠에서 죽어갈 수밖에 없었기에 배트맨이 탄생은 어릴 적 나에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많은 영화들에서 다루어왔던 영웅 서사의 탄생 배경 중 하나가 공권력의 무능함으로 인해 만들어진 폭력적 현실에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은 언젠가부터 영화사에서 하나의 클리셰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로 인해 탄생한 영웅들은 절대 악으로 묘사되는 빌런들에게 다분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적 제재를 가해왔고 우리는 그러한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공권력이 이뤄주지 못했던 정의를 그 정당한 폭력으로부터 충족하며 카타르시스를 느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폭력의 짜릿함은 전통적인 히어로를 넘어서서 다크 히어로가 보여주는 정당성이 부족한 폭력마저 대중들이 허용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인식은 고리타분한 도덕 의식 따위는 벗어던지고 기존에 금기시되던 가학적인 폭력마저 서슴없이 자행하는 안티 히어로까지 매력적인 캐릭터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이러한 많은 영웅들의 서사가 반복되어도 매력을 잃지 않는 이유는 공권력이나 사회의 시스템은 즉각적으로 정의를 실현시키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럴 능력이 없는데 비해 영웅들은 그들이 가진 초인적 능력을 통해 이를 단숨에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그러한 판타지적 요소가 영웅 서사에서 느끼는 카타르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웅들의 폭력은 폭력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영화도 그들의 폭력을 정의의 실현인 것처럼 보여준다.
우리가 이러한 영웅들의 폭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넘어서서 정당하게 느끼고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일상의 폭력을 헤쳐나갈 힘이 없고 사회의 질서는 그러한 정의를 실현해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기 그런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실의 우리에겐 그러한 폭력이나 부당함에 맞설 힘이나 용기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이를 대신하여 바로잡아줄 초인의 등장을 기대하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흉악범을 제압하는 일반인의 영웅담이나 사회적 부조리와 싸우는 운동가의 활약에 대중이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심리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군중심리의 반영이 우리가 영웅 서사에 열광하는 이유는 아닐까.
하물며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초인적 능력의 영웅이 영화속에서나마 압도적인 힘으로 악을 응징해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극적인 쾌감을 맛볼 뿐 영웅의 행위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고민하게 하지 않는다. 주먹으로 때리는, 총을 쏘든, 레이저를 발사하든, 망치나 도끼를 휘둘러 때리거나 우주괴물에 잠식된 인간이 악당의 머리를 뜯어먹는 장면에서조차 잔인한 폭력의 공포보다 짜릿한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2. 영웅들의 폭력은 과연 정당한가
그 다양한 영웅 서사의 변주들 속에 배트맨 시리즈는 존재하고 있다. 다분히 최초의 다크 히어로 느낌을 주는 영웅인 배트맨은 그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했기에 독특한 서사의 힘을 가지고 두둑한 팬 층을 보유해왔다. 현실 사회의 온갖 부정적인 모습들이 조금은 과장되게 표현된 고담시의 분위기는 다크 히어로인 배트맨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배경이 되어 배트맨의 캐릭터를 더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게다가 배트맨 시리즈의 빌런들은 다른 영웅 서사 속 빌런들처럼 절대 악으로 등장하며 무자비한 폭력을 자행하는 질서의 파괴자로 묘사되지만 그 탄생의 순간 어딘가에 조금은 다른 빌런들만의 서사를 가진다. 그 서사 안에는 선량한 누구나라도 감정을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기에 그들은 응징의 대상이면서 한편으로는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초기 악당인 조커가 겪었던 가정 폭력의 서사라거나 팽귄맨이 겪었던 장애를 갖고 태어나 버려지게 되는 버려지는 아이 서사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빌런들의 탄생 배경이 결국은 또 다른 사회적 폭력이라는 것은 배트맨의 탄생과 유사성을 가진다. 단지 배트맨은 자신과 가족이 겪은 폭력을 극복하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자라면 빌런들은 그 반대에 서서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파괴하려는 파괴적 본성에 더 기울어진 자라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이런 면에서 배트맨의 서사는 단순한 선악구도를 가진 다른 영웅 서사들과 차이를 갖는다. 배트맨의 다크히어로적 성격 또한 여기서 도드라지는데 악인은 그 탄생에 동정심을 갖게 되는 부분이 있지만 결국은 지서의 파괴자들로서 징벌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 징벌이 개운치 못한 부분이 있기에 배트맨은 밝은 곳에 나와서 활동하지 않고 어둠 속에서 악당들의 방식인 폭력적 방식으로 그들을 응징한다. 배트맨의 고독한 이미지는 여기서 생겨난다. 밝음으로도 나서지 못하고 어둠으로도 타락하지 못한 그 중간에서 공권력과 같은 사회적 시스템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힘의 불균형을 아슬아슬하게 자신이 가진 압도적인 재력과 힘으로 조정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배트맨 속 악당의 징벌이 개운치 못한 이유는 대중이 동정심을 갖도록 만든 악당에게 부여한 서사 때문이다. 악당에 대한 동정심을 느끼는 대중에게 배트맨이 보여주는 악당에 대한 폭력은 불편함을 느끼게 한다. 애초에 악인이었던 존재가 아니라 사회의 폭력이 만들어낸 악인에게 또 다른 폭력으로 징벌을 가하는 모습에서 대중은 무의식적으로 부당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힘없는 대중들도 한번쯤은 부조리한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하는 자기파괴적인 생각을 가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들을 선악으로 나누어 그 근본적 이유에 대한 고민 없이 악으로 치부한다면 영웅의 폭력은 쾌감보다는 부당한 폭력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빌런을 동정할 서사는 최소화되고 악행은 극대화되어 표현되기에 영웅의 폭력이 더 정당한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지만 이러한 고민의 지점이 배트맨이란 영화가 가진 어두운 분위기를 더욱 그럴듯하게 만들어주는 서사의 독특함이 된다. 배트맨은 정의의 편에 서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탄생과 같은 출발점에서 탄생한 동류를 처단해야 하는 비극적 영웅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폭력에는 고민이 담겨있는 것이다.
3. 조커의 탄생 – 사회적 폭력의 근본에 대한 고민의 시작
이러한 빌런에 대한 서사의 부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에 대한 성찰과 탐구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면에서 영웅이 보여주는 정당한 폭력의 쾌감을 넘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의 순환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에서 만들어진 빌런 서사의 극대화가 바로 조커 1편인 것이다.
조커 1편에서의 조커는 동정받는 악당 정도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으로 조커는 기존 배트맨 시리즈에서의 빌런인 조커와는 확연히 다르다. 도덕심 따위는 한 톨도 없이 폭력과 파괴, 무질서를 서슴없이 조장하는 배트맨의 조커가 배트맨의 반동인물로 만들어진 완성된 조커라면 조커 1편에서의 조커는 결말에서야 조커로 완성되는 조커의 성장 일기이다. 조커 1편에서 주인공 아서 플렉은 아서 플렉과 조커라는 두 정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과정에서 조커가 아서 플렉을 지배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까지나 그 개연성 면에서 조커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의 설득력일 뿐 그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열악한 현실 속에서 비극적인 선택의 연속에 놓여져 결국에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지만 영화 속 아서 플렉은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한 6명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자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살인자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아서 플렉이 겪는 잔혹한 현실의 일부를 우리도 또한 경험하며 그가 느끼는 부당함을 우리도 느끼기 때문 아닐까? 더 나아가 아서 플렉이 보여주는 자기파괴적 선택을 우리도 한번쯤은 마음 속으로나마 생각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품고 있었을 뿐이고 아서 플렉은 그러한 파괴적인 감정을 외부로 표출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인간은 지독히도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자신과 닮은 동류에게서만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느낀다. 같은 포유류의 죽음에서는 비극적 감정이나 슬픔을 느끼지만 갑각류 따위를 산 채로 쪄서 먹거나 다족류이지만 지능이 뛰어난 문어를 산 채로 삶아서 먹는 일에는 그만큼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연민의 감정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그 연민의 대상은 지극히 편협한 것이 또한 인간의 본성이다. 아무 이유 없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인을 일삼는 사이코패스 범죄자에게 연민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같은 인간이어도 공감할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적 상황에 몰려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가족을 죽이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실제 사건들에서는 우리는 슬픔과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어찌 보면 살인이라는 결과는 차이가 없기도 하고 오히려 존속살인이라는 더 잔혹한 범죄로 생각할 수 있는 사건임에도 우리는 사이코패스의 범죄보다 후자의 범죄에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이유는 정도의 차이일 뿐 우리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은 절망적 경험을 일상적으로 반복하기에 느끼는 동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살면서 숱하게 많은 절망적 상황에 놓이게 되고 그러한 상황은 특히나 삶이 더 고단할 수밖에 없는 취약한 계층일수록 더 많이 겪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가 피라미드식 계층의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겪는 절망감에 공감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사실 우리는 부르스 웨인보다 아서 플렉에게 공감할 준비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부르스 웨인이 겪은 비극은 슬픈 일이지만 부모를 대체할 집사도 있고 막대한 재력도 있으며 재력을 통해 만들어진 초능력에 버금가는 과학기술의 힘도 있기에 그는 자신의 비극을 극복하고 질서의 수호자인 배트맨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배트맨은 영웅 서사에서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초인적 능력이 없지만 초인과 다름없다. 그는 우리의 공감의 대상이기보다는 다른 여느 영웅들처럼 경외의 대상일 뿐이다. 현실의 우리에게 부르스 웨인은 인간이지만 범접할 수 없든 영역의 인간이다. 그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부르스 웨인은 무질서와 폭력 속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어도 질서의 회복이라는 정의의 편에 설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오히려 무능한 공권력을 대신해서 현실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어찌 보면 개인으로서는 대단히 오만한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아서 플렉은 어떤가. 그는 부르스 웨인과는 극단의 반대편에 서 있다. 그가 겪은 사회적인 폭력은 부르스 웨인이 겪은 폭력에 비하면 너무도 어마어마하고 다중적이며 집요하다. 광고판을 들고 거리에서 광고를 하는 그를 10대 여럿이 폭행하는 시작 장면부터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마저 그를 멸시하고 외면하는 듯한 상담사의 태도, 직장 안에서 그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로 대표되는 난쟁이가 겪는 멸시와 착취는 그가 처한 절망적 현실을 잘 보여준다. 유일하게 호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였던 직장 동료가 건넨 총 한 자루는 그의 불안한 심리와 맞물리며 호의가 되기는커녕 불안함 속에서 결국은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 과정에서 애초에 총을 건넨 동료의 의도조차 호의가 아니었음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후 직장에서 비참하게 쫒겨난 아서 플렉이 삐에로 분장을 지우지도 못한 채 승차한 지하철에서 여성을 희롱하던 화이트칼라의 직장인들에게 발작적 웃음의 정신적 문제로 집단 린치를 당하던 중 우발적으로 발사되어 살인을 하게 되면서부터 아서 플렉의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애초에 그에게 행복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코미디언인 머레이가 자신의 쇼에서 자신을 격려하는 내용이나 이웃집 여성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며 자신과 교감하는 장면 등 그가 경험한 모든 긍정적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서 조작된 것임이 나중에야 드러나게 된다. 또한 그의 유일한 삶의 의미는 비극적 현실을 사는 자신의 처지에도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다는 직업적 자부심 내지는 소박한 만족감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박한 희망조차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머레이에게 부정당하고 조롱당하게 된다. 그리고 애초에 그러한 자부심도 사실은 자신의 정신병적인 웃음을 해피라는 별명으로 희화화한 어머니 때문이었다는 점은 아서 플렉의 비극적 운명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코미디언인데 웃겨야 하지 않냐는 어머니의 말은 그의 긍정적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토록 철저하게 불행한 삶을 사는 아서 플렉은 자신의 불행에 저항할 한 줌의 힘도 없다. 어머니의 고백으로 자신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이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는 오히려 철저한 냉대와 혐오로 자신에게 돌아온다. 토마스 웨인을 찾아가 아들임을 확인받으려는 아서 플렉의 기대는 오히려 자신이 어머니에게 입양되었고 어머니가 웨인가에 대한 집착으로 정신병으로 수감되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그 과정에서 아서 플렉은 아버지의 따뜻함을 바라고 만난 토마스 웨인이 어머니를 모욕하고 자신을 혐오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다시 절망하게 된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아서 플렉에게 지하철 살인사건의 수사망은 좁혀 오고 그는 절망적 상황에서 머레이 쇼에 섭외 요청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토마스 웨인의 말을 확인하기 위해 아캄 정신병원을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그의 말이 사실이고 자신의 웃음이 어린 시절 양부의 학대와 양모의 방임으로 인한 정신적 문제였음을 알게 되고 해피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와 웃음을 주겠다던 자신의 생각과 긍정적 정체성 모두가 기만에서 비롯된 허구였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유일한 자신의 위안이었던 이웃집 싱글맘 소피의 호의조차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한 것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모든 삶의 기반이 애초에 어머니의 기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존재였다는 것을 확인한 아서 플렉은 비극적 삶의 시작점이었던 어머니를 찾아가 베게로 질식사시키고 머레이의 쇼에서 자신의 비루한 삶을 마무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조커는 아서 플렉 내면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그로 인한 파괴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다. 그 파괴의 양상이 소극적인 경우에는 자기 파괴로 치닫게 되고 적극적인 경우에는 사회의 파괴로 내닫게 되는 것이다. 아서 플렉은 이러한 파괴의 본능이 자기에게서 시작되었다가 외부 세계로 확대되는 과정을 거친다. 현실 속 삐에로인 아서 플렉은 비극 속 안에 갇혀 살아야 하지만 그 삐에로가 조커가 되는 순간 카드 게임에서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룰을 파괴하는 무법적 존재인 조커는 막대한 힘을 갖게 된다. 삐에로로서 비극적 현실에도 웃음을 팔아 근근히 살아왔던 아서 플렉은 피에로라는 최소한의 긍정적 정체성을 해고를 통해 상실하며 극단에 몰리게 된다. 그 상황에서 지하철에서 여성을 희롱하던 화이트 칼라의 금융맨들의 눈에 그의 발작적 웃음이 거슬리게 되고 그들의 집단 린치는 어디에서도 배려받지 못하며 항상 부조리한 폭력에 노출되어야 했던 사회적 약자인 아서 플렉 내면의 분노에 불을 붙이게 된다. 우발적 저항으로 두 명을 죽인 아서 플렉은 도망치는 남자를 쫓아가 남은 총알들을 모두 발사하며 살인을 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지켜왔던 모든 사회적 질서와 규칙이라는 선을 넘어서면서 비극적 운명의 삐에로에서 무엇이든 가능한 조커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신의 집을 찾아온 랜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은 조커의 탄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호의인척 총을 건넨 그로 말미암아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고 모든 것을 잃게 된 아서 플렉 앞에 다시 나타난 랜들은 여전히 약자인 난쟁이 개리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보여주고 이제는 우발적 살인이 아닌 의도를 가지고 잔인하게 랜들을 살해하며 조커의 탄생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도 선량한 개리를 보내주며 보이는 호의는 조커의 살인이 단순한 광기의 살인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자행되는 폭력적 현실에 대한 분노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조커는 아서 플렉 내면의 조커가 탄생한 순간이었다면 아서 플렉의 살인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지지를 받는 이후의 장면부터 조커는 아서 플렉 내면의 조커가 아닌 하나의 사회적 상징이 되어버린다. 이는 아서 플렉이 예상하거나 기대한 것이 아니었으며 아서 플렉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만들어진 우상이 된다. 그 우상은 아서 플렉을 조롱하기 위해 자신의 쇼에 아서 플렉을 초대한 머레이를 생방송 도중 살해하는 장면에서 극대화되며 그 순간 조커는 아서 플렉 개인의 조커가 아닌 억압받고 조롱 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분노를 대변하는 상징으로서의 조커가 된다. 그 순간까지도 아서 플렉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 없이 탄생한 조커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머레이의 쇼에 참석한 것이었지 누군가를 선동하거나 사회의 아이콘이 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쇼에 출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절망은 사회의 파괴가 아닌 자신의 파괴에 닿아 있었으며 그는 머레이의 쇼에 자신을 죽이기 위해 간 것이지 누군가 타인을 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극단적 선택의 마지막 순간에 일말의 기대를 품고 자신의 손을 잡아주거나 자신을 이해하고 안아줄 누군가를 기대하며 쇼에 나간 것은 아닐까. 그러나 한 치의 동정과 배려, 그리고 그와 그를 둘러싼 현실의 폭력을 이해하려는 노력은커녕 그를 조롱의 대상으로만 삼고 방송의 소재로 이용하려는 그 모든 악의에 아서 플렉 내면의 조커는 자신의 파괴 대신 머레이의 살해라는 사회적 파괴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 조커는 아서 플렉 개인 내면의 조커에서 억업받고 조롱당하는 사회적 약자의 분노를 대변하는 사회적 상징으로서의 조커로 완성된 것이다.
배트맨 시리즈를 보며 왜 항상 배트맨은 고독하게 혼자 싸우는데 악당들은 무수히 많은 추종자들이 따르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돈 많고 정의롭고 잘 생긴 배트맨에게는 기껏해야 로빈 정도가 따르는 데 비해 폭력과 공포, 무질서를 조장하는 조커같은 빌런들에게는 왜 항상 많은 무리들이 그를 따라 그의 뜻에 동조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영화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 대해 빌런 탄생의 서사를 통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주며 기존의 사회를 부수고싶은 폭력의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적 질서에서 보호받지 못하거나 사회적 약자로서 학대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분노였던 것이다.
기존의 질서가 공정하지 못하며 자신에게 부당하게 적용되어 사회적 약자로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질서를 바로 잡는 편에 서거나 아니면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쪽에 서는 것이다. 기존의 질서는 힘을 가진 자들의 질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삶이 힘들기만 한 서민들은 사회가 정의롭지 못할수록 기존의 질서를 바로잡기보다는 파괴하는 쪽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아서 플렉처럼 최하층민일수록 고담과 같은 사회에서는 질서의 회복으로 달라질 것이 없다. 오히려 기존 질서의 회복은 기득권을 더 공고하게 할 뿐이며 무질서와 해체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들의 조커에 대한 지지는 이러한 면을 잘 보여준다. 아무 의미 없는 사회적 약자였던 아서 플렉이 기존의 질서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조커가 되자 그를 숭배하는 대중의 모습에서 이러한 점이 확인된다. 그러나 아서 플렉의 조커는 이러한 대중의 지지를 비웃는 듯이 보인다. 머레이를 죽이고 잡혀가는 그가 경찰차 안에서 다수의 조커들에 의해 혼란에 빠진 사회를 보고 발작적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에 대한 신뢰보다는 자신이 원했던 세계의 파괴를 목격하는데서 오는 통쾌함의 웃음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 대중들조차 신뢰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으로부터 촉발된 기존 질서에 대한 부정과 파괴의 본능이 통쾌할 뿐인 것이다. 그러한 폭력과 파괴이 본능은 그 방향을 알 수가 없고 결국은 돌고돌아 아서 플렉에게 폭력을 가한 가해자들에게까지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토마스 웨인과 그의 부인은 조커의 지지자에 의해 살해된다. 그 광기어린 폭력의 정점에서 무너져가는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위대에 의해 탈출한 조커는 미소지으며 폭력의 광기를 찬양하는 것이다.
조커 1편의 에필로그가 보여주는 열린 결말
1편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조커는 사회복지사와의 상담에서 다시 웃음을 터뜨린다. 웃음의 이유를 물어도 조커는 말해봤자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혼자 웃기만 한다. 이는 무수히 많은 광기의 폭력이 그 이유 또한 각양각색이기에 동일할 수 없으며 서로 이해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낮은 곳에서 고통받았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을 것이라는 아서 플렉의 심정이 담겨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교차되는 장면에서의 고아가 된 부르스 웨인의 모습은 광기의 폭력이 낳은 또다른 희생자를 보여주며 방향성 잃은 폭력이 죄없는 희생자를 어떻게 양산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금 조커의 폭력을 암시하는 피로 물든 발자국이 고아가 된 토마스 웨인과 조커가 어떤 방식으로 대척점에 설 것인지를 암시하듯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