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 충분과 필요
나는 선과 악을 말할 때, 먼저 논리학의 교과서에서 잠시 물러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은 형식논리의 정확한 정의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사람을 보고 마음을 읽고 어떤 행동을 평가할 때 실제로 어떻게 판단하는가, 그 생활 속의 구조를 붙잡아보려는 시도에 가깝다. 법정의 판결문도 아니고, 종교적 교리도 아니다. 내가 살아오며 느낀 판단의 비대칭, 그러니까 왜 선은 어렵게 증명되고 악은 쉽게 낙인찍히는가에 대한 개인적 구조화다.
내가 느끼기에 악은 아주 작은 기스만으로도 악으로 되기 충분하다. 한 번의 비열한 말, 한 번의 의도적인 무시, 한 번의 비겁한 회피만으로도 우리는 상대에게서 악한 마음을 읽어낸다. 반면 선은 다르다. 선은 한두 번의 친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선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많은 악의 가능성들이 반복적으로 기각되어야 한다. 유리한 순간에도 이용하지 않았는지, 화가 난 순간에도 무너뜨리지 않았는지, 손해 보는 자리에서도 기준을 유지하는지. 선은 그렇게 여러 가능성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인정된다. 그래서 선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 악은 짧은 장면으로도 충분하지만, 선은 긴 시간의 증명을 요구받는다.
이 비대칭 때문에 선은 정복의 형식을 띠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정복은 타인을 짓누르는 정복이 아니라, 자기 안의 다른 가능성들을 제거해 나가는 정복이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는 것, 이길 수 있었지만 밀어붙이지 않는 것, 상처를 돌려줄 수 있었지만 멈추는 것. 선은 이렇게 가능성을 줄여가며 자신을 증명한다. “나는 이럴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축적이 선의 형식을 만든다. 그래서 선이 증명된 뒤 남는 것은 의외로 크고 화려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아주 작고 조용한 형태일 수 있다. 단지 넘지 않을 선 하나, 반복해서 지켜낸 태도 하나, 누가 보지 않아도 무너지지 않는 작은 기준 하나. 선은 종종 거대한 이미지가 아니라 정제된 잔존물의 형태로 남는다.
악도 겉으로 보면 정복의 이미지가 있다. 밀어붙이고, 빼앗고, 굴복시키고, 파괴한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순수한 악, 거의 의지적이고 창조적인 파괴의 악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마주치는 악한 마음이다.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비틀린 마음, 남이 잘되는 것이 거슬리는 마음, 지연과 막힘 앞에서 튀어나오는 공격성, 억울함을 이유로 누군가를 끌어내리고 싶어지는 마음. 이런 악은 대개 정복이라기보다 결핍의 언어에 가깝다. 무언가를 빼앗아 세계를 넓히려는 것이라기보다, 내 안의 불일치를 메우기 위해 밖에서 무엇을 끌어오려는 마음에 가깝다.
잘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의외로 악해지기 어렵다. 일이 잘 풀리고, 관계가 과도하게 막히지 않고, 내 안의 판단과 행동이 크게 충돌하지 않을 때 악한 마음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 악한 마음은 대개 충돌과 막힘과 지연에서 등장한다. 가려고 하는데 막힐 때, 인정받고 싶은데 누락될 때, 내 기준대로 이어지던 흐름이 외부의 개입으로 끊길 때. 그때 마음속에는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서 어떤 메우기 충동이 생긴다. “이 불일치를 빨리 없애야 한다”는 마음, “내가 잃은 것을 지금 채워야 한다”는 마음, “이 지연을 누군가의 책임으로 돌려야 한다”는 마음. 이때의 악은 파괴의 쾌락이라기보다 결함 보수의 조급함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일상적 악은 필요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물론 그것이 진짜 필요한 것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그것을 필요처럼 느낀다. 사과를 받아야 할 것 같고, 보상을 받아야 할 것 같고, 상대를 눌러야 내 균형이 돌아올 것 같고, 한마디를 되돌려줘야 내 자존이 복구될 것 같다. 악한 마음은 종종 “이건 하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지금 하지 않으면 내가 무너진다”는 식의 긴급성을 띤다. 바로 여기서 악은 강해진다. 충분이 아니라 필요의 언어를 빌려오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감정의 파동일 수 있는데도, 마음은 그것을 생존의 요청처럼 번역해 버린다.
반대로 선은 필요의 언어만으로는 잘 유지되지 않는다. 선은 순간의 긴급성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선은 오히려 충분의 언어를 오래 붙드는 쪽에 가깝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지, 어떤 기준 위에서 살고 싶은지에 대한 더 큰 그림이 있어야 한다. 그 큰 그림이 있어야 당장의 악한 마음을 ‘지금 꼭 해야 하는 일’로 승격시키지 않을 수 있다. 선은 단지 참는 힘이 아니라, 더 큰 충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작은 필요의 과장을 보류하는 힘이다. 그래서 선은 느리고, 악은 빠르다. 악은 당장의 균열을 메우려 하고, 선은 전체 구조를 보려 한다.
이렇게 보면 선과 악의 차이는 단순히 도덕 감정의 차이라기보다 판단의 구조 차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은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자신을 증명하고, 악은 결핍을 메우려는 필요의 형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한다. 선은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음”의 축적 위에 서고, 악은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됨”의 압박 위에서 튀어나온다. 선은 구조를 길게 보고, 악은 균열을 급하게 메운다. 선은 전체의 리듬을 지키려 하고, 악은 현재의 통증을 먼저 없애려 한다.
물론 이 말이 악을 면책해 준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악한 마음을 단지 “나쁜 사람의 본성”으로만 이해하면 우리는 그것이 언제, 어떤 구조에서, 어떤 지연과 막힘 속에서 발생하는지 보지 못한다. 그러면 같은 마음은 계속 반복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악을 합리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악이 등장하는 구조를 더 정확히 보자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악한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그것을 곧장 필요로 승인하지 않고, 한 박자 늦춰 볼 수 있다. 지금의 이 마음이 정말 필요한가, 아니면 막힌 흐름이 만들어낸 과장된 긴급성인가.
선 역시 마찬가지다. 선을 타고난 성품으로만 보면, 선의 반복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기 어렵다. 선은 타고나는 면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더 많이 지워내고 더 많이 기각해 본 판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선은 가능성을 버리는 훈련을 통해 생긴다. 해도 되는 것을 하지 않는 판단, 당장 유리한 길을 보류하는 판단, 상처를 증식시키는 가장 쉬운 길을 끊는 판단. 그런 판단이 쌓일수록 선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정밀해진다. 그래서 선은 종종 작아 보인다. 그러나 그 작은 형태는 많은 가능성의 폐기 위에서 남은 것이기에 단단하다.
결국 내가 붙잡고 싶은 문장은 이것이다. 악은 작은 결함에도 충분히 발생하고, 선은 많은 가능성의 제거 이후에야 겨우 충분해진다. 그래서 선은 느리고 악은 빠르다. 그래서 선은 정복하고 악은 메우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선을 지키기 위해 더 큰 충분을 가져야 하고, 악을 다루기 위해 과장된 필요를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
선과 악의 문제를 이렇게 보면, 도덕은 멀리 있는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매일의 판단 연습으로 내려온다. 어떤 말 앞에서, 어떤 지연 앞에서, 어떤 상처 앞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필요라고 부르고 있는가. 그리고 내가 지키고 싶은 더 큰 충분은 무엇인가. 아마 선과 악은 그 질문의 크기보다, 그 질문을 붙들고 버티는 시간에서 갈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