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구조*

그냥의 충분학

by uidan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냥 했어.

그냥 좋았어.

그냥 싫었어.

그냥 계속하게 되더라.


이 “그냥”은 대개 설명을 포기하는 말처럼 들린다. 이유를 모르겠다는 말, 생각 없이 했다는 말, 혹은 말하기 귀찮다는 말처럼 취급된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많은 경우 “그냥”은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이 너무 많이 지나간 뒤에 남은 말이다.


처음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왜 이 길로 가야 하는지,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왜 저 사람을 피하는지, 왜 이 일을 계속하는지. 우리는 처음에는 판단으로 길을 만든다. 이쪽이 더 낫다, 저건 피해야 한다, 지금은 버텨야 한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그렇게 판단이 반복되면 길이 생기고, 길이 굳어지면 구조가 된다.


그다음부터는 설명이 줄어든다. 이미 길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한다”는 판단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판단이 너무 잘 작동해서, 지금은 문장으로 등장할 필요가 없어진 상태에 가깝다. 판단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구조가 된 것이다. 우리는 그 구조 위를 걸으면서 “그냥”이라고 말한다.


이때의 “그냥”은 가벼움이 아니라 축적이다.


예를 들어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 앞에 앉는 사람은, 매번 거창한 결심으로 앉지 않는다. 앉아야 하는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냥 앉는다. 하지만 그 “그냥” 뒤에는 수많은 작은 판단이 퇴적되어 있다. 앉아보니 나아졌던 날, 미루다 무너졌던 날, 버티는 것이 결국 나를 살렸던 경험, 조금씩 쌓여 생긴 자기 방식. 그 반복이 구조가 되었고, 구조가 된 뒤에야 “그냥”이 가능해진다.


반대로 아직 구조가 없는 일에서는 “그냥”이 잘 나오지 않는다. 자꾸 이유를 붙이게 된다.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금이 맞나 아닌가, 이게 나한테 맞나 안 맞나. 길이 없으니 판단이 계속 전면에 나온다. 피곤하다. 이 피로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아직 충분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피로일 때가 많다.


나는 여기서 “충분”을 조금 다르게 보고 싶다. 충분은 단지 “조건이 충족되었다”는 논리학의 문장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흐름이 반복될 수 있을 만큼 길이 나 있는 상태다. 다시 말해 충분은 결과가 아니라 구조다. 내가 나를 계속 움직일 수 있게 만드는 내부의 설계도다.


그러니까 “그냥의 충분학”이란 이런 것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신비화하는 학문이 아니라, 설명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구조를 읽어내는 시도.

“그냥”을 무의식의 핑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반복과 판단이 축적된 결과로 보는 시도.


물론 모든 “그냥”이 좋은 것은 아니다. 어떤 “그냥”은 무감각일 수 있고, 어떤 “그냥”은 타성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그냥”이 나를 살리는 구조인지, 나를 소모시키는 구조인지 구분하는 일이다. 계속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생각을 멈추게 만드는가. 박동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흐름을 막는가.


좋은 “그냥”은 대개 나를 가볍게 만든다.

에너지를 아끼게 하고, 중요한 곳에 판단을 남겨둔다.

매 순간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게 해준다.


나쁜 “그냥”은 대개 나를 둔하게 만든다.

질문해야 할 순간에도 자동으로 흘러가게 하고,

이미 끝난 구조를 계속 반복하게 만든다.


결국 문제는 “그냥”의 유무가 아니다.

어떤 충분이 그 “그냥”을 만들었는가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그냥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미 오래 생각해 온 방식으로 그냥 한다.


그래서 삶을 바꾸고 싶을 때 매번 의지를 탓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필요한 것은 더 강한 결심이 아니라, 새로운 “그냥”이 가능해질 만큼의 충분을 다시 설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좋은 삶은 거창한 순간들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대부분은 설명이 사라진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반복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오랫동안 쌓아온 충분의 구조다.


그냥의 충분학은 아마 거기서 시작된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계속하는 것들,

그리고 내가 아무 말 없이 자꾸 무너지는 것들.

그 둘의 차이를 읽는 일에서.




작가의 이전글판단의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