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구조*

or와 and, 충분과 필요의 언어

by uidan


— 조문을 읽는다는 것


법조문에서 “또는”과 “그리고”는 단순한 접속사가 아니다. 이는 충분과 필요를 배열하는 기술이다. “A 또는 B”는 각각이 결과에 도달하기 위한 충분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고, “A 그리고 B”는 둘 모두를 통과해야만 성립하는 필요의 구조를 뜻한다. 접속사는 곧 판단의 설계도다.


그러나 조문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단순히 or와 and를 구분하는 데 있지 않다. 더 깊은 층위는 충분과 필요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있다.


먼저 충분의 영역에서 중요한 태도는, 각 충분에서 그 안의 필요를 뽑아내어 생각하는 일이다. 예를 들어 A 또는 B라고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흔히 A가 해당되지 않으면 “그럼 안 되는 것 아닌가?”라고 반응한다. 하지만 이는 충분의 구조를 오해한 판단이다. A와 B는 나란히 놓여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목적을 향하고 있다. 각각은 독립적인 길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공통의 필요가 숨어 있다. 비문학 지문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다. 제시된 여러 조건이나 사례는 서로 다른 충분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는 공통된 논지나 목적이 있다. 한 충분이 해당되지 않는다고 해서 전체 구조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충분이 어떤 목적을 향해 배치되었는지를 읽어내는 일이다.


실제로 충분조건은 종종 특별한 사정을 전제로 한다. 특정한 상황, 특정한 맥락, 특정한 전형을 가정한다. 그래서 충분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제한적인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는 조문이나 이론이 지향하는 목적을 향해 배열된 방향들이다. 충분을 해석할 때는 “이 조건이 있느냐 없느냐”에 머무르기보다, “이 조건이 어떤 목적을 향해 배치되었는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반대로 필요의 영역에서는 태도가 달라져야 한다. 필요는 꼼꼼히 따져야 한다. 충분들 사이에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각 충분이 과연 그 필요를 충족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선행 순서다. 충분이 아무리 많아도 필요를 통과하지 못하면 결과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는 언제나 판단의 바닥을 형성한다.


그러나 필요는 항상 목적을 직접적으로 포함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보일 때가 많다. 법에서는 “이와 같은 경우에는 아니하다”와 같은 반사실적 조건문이 등장하고, “사회 통념상 상당한 경우”와 같은 객관적 판단 기준이 제시된다. 이는 목적을 직접 말하기보다, 그 목적을 보호하기 위한 울타리를 세우는 방식이다. 필요는 종종 결과를 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조건이라기보다, 그 결과가 남용되지 않도록 경계를 설정하는 조건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조문을 읽을 때는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 충분들 사이에서 무엇이 빠졌는지를 찾기 전에, 그 충분들이 향하고 있는 공통 목적을 읽어내야 한다. 둘째, 그 다음에야 각 충분이 필요를 충족하는지, 경계를 넘지 않았는지를 따져야 한다. 순서가 바뀌면 해석은 쉽게 왜곡된다.


충분은 방향을 제시하고, 필요는 그 방향을 통과시킬 문턱을 만든다. or와 and는 그 구조를 언어로 드러낸 표식일 뿐이다. 조문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그 문턱과 방향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찾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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