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구조(1)

기준

by uidan

우리는 판단을 내리기 전에 이미 어딘가에 서 있다. 생각을 시작하기 전에, 선택을 하기 전에, 말 한마디를 꺼내기 전에 이미 어떤 기준 위에 발을 올려놓은 상태다. 그 기준은 보통 의식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옳다고 여기는지보다 무엇이 당연하다고 느껴지는지를 더 빠르게 따른다. 그래서 판단은 언제나 생각보다 먼저 움직인다.


기준은 선이다. 어디까지를 같은 것으로 볼 것인지, 어디부터를 다른 것으로 나눌 것인지를 가르는 선이다. 이 선이 그어지는 순간 세계는 나뉜다. 포함되는 것과 제외되는 것,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 지켜야 할 것과 감수해도 되는 것들이 동시에 생겨난다.


이 선은 개인의 성격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관계 속에서, 반복된 경험 속에서, 어느새 익숙해진 장면들 속에서 조금씩 굳어진다. 자주 보아온 방식은 안전처럼 느껴지고, 낯선 선택은 위험처럼 느껴진다. 이때 기준은 사실이 아니라 감각에 가깝다. 옳아서가 아니라 익숙해서, 틀려서가 아니라 불안해서 피하게 되는 선들이다.


그래서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전혀 다른 판단을 한다. 무엇을 먼저 떠올렸는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가능성을 보고, 누군가는 위험을 본다. 같은 장면이지만 기준이 다르기에 세계는 전혀 다른 모양으로 잘린다.


기준이 다르면 판단은 충돌한다. 그러나 그 충돌은 대개 의견의 차이로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선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는 종종 평행선을 그린다. 말이 닿지 않는 이유는 생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출발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준을 바꾸려 한다. 상황이 힘들어질 때, 결과가 어긋날 때, 지금의 판단이 나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선 자체를 다시 긋고 싶어진다. 하지만 기준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한 번 세계를 나눈 선은 그 위에서 수많은 선택과 감정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을 바꾸는 일은 생각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세계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일에 가깝다. 이 책은 그 선을 옮기자고 말하지 않는다. 어디가 옳은 선인지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이미 서 있는 그 선 위에서 판단을 바라보려 한다.


이 선 위에서,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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