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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의권 Feb 26. 2019

아버지의 군불

이제 내 아버지의 그때가 되어  2017. 3.3

2017년 언젠가 고향집에 들렸다. 엄마는 내가 죽을 날까지 엄마라 부를 친근함이 있지만, 아버지와의 만남에 어떤 정서적인 기대감은 없다. 늘 묵묵히 일하시고 하고 싶은 말만 간단히 하시는 전형적인 경상도 아버지의 전형이다. 저녁을 먹고 거실 구석에서 신문을 보시다가 옆에 앉는 40대 중반의 아들에게 넌 지니 던지시는 말 "돈 벌기 힘들제?". 그런데 그순간은 전과 같이 않게 마음속에 쓰나미 같이 밀려오는 느낌이 있었다. 예전에는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갑작스러운 먹먹한 느낌을 감출 수 없는 목소리로 "예... 아부지, 힘드니더...". " 그래, 나도 그때 그랬다". 더 무슨 말을 한 것 같지 않다. 나는 티비 리모컨을 들었고 아버지는 신문을 계속 보신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에 나눈 느낌은 고승들의 선문답 보다 더 진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릴 적 고향집은 전형적인 시골집, 마당 한편에 소를 키우고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린 그런 집이었다. 안방은 연탄보일러가 있어서 겨울밤에 따뜻했지만, 작은방은 온돌방이라 추운 겨울 새벽에 온돌이 식고 문풍지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방에서 입김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춥기도 했다. 새벽 4시쯤 되면 두꺼운 솜이불을 부여잡고 웅크리며 반쯤 잠이 깬 귀로 늘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작은방 뒤에 군불을 넣는 아궁이에 소죽을 끓이는 무쇠 솥뚜껑을 스르릉 여는 소리다. 물을 붓는 소리가 들리고 여물을 써는 작두 소리, 다시 솥뚜껑이 닫히고 나면 온돌방 구석의 미세한 틈으로 메케한 연기가 스며 나온다. 하지만 그 연기는 요즘 말로 불맛이라 부르는 그런 느낌의 연기 냄새이다. 그 연기가 사라지고 차츰차츰 다시 방이 따뜻해지면 웅크리고 있던 몸을 양지에 배부른 고양이 같이 나른히 펴고 다시 꿀잠을 잔다.


  벌써 2년 반이나 지났지만 사우디에서 5년 동안 일하고 돌아온 2016년 후반기는 실직자였다. 내 인생에 그런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이나 삶에 대한 의욕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상황이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를 읊조리며 지금이 전부가 아니라고 매일매일 다짐했지만, 텅 빈 아파트 밴치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기만 했다.

다행히 2017년 초에 다시 일을 하게 되었다. 그곳도 건설사업의 관리자 일이라 아침에 일찍 출근하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문득 차창 밖 아직 어두운 하늘을 보니 밝은 새벽별들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새벽별의 노래 따라 힘찬 찬송 부르니 주의 사랑 줄이 되어 한맘..." 다행히 인적이 없는 도로라 눈물을 훔치며 운전했던 것 같다. 그런 순간은 나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그분의 작은 만지심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아버지의 삶과 마음들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아니 말보다 그냥 아버지의 모습,  더 주름진 눈가와 더 처진 어깨를 보면 더욱더 느껴진다. 아버지와 나의 삶에 공통분모가 조금씩 더 늘어갈수록 그냥 삶으로 이해되는 부분들이 느껴지고 보인다. 하늘 아버지도 내가 이해되고 받아들일수 있는 때에 그 만큼 보여주시는것 같다. 과연 그 출근길의 그 새벽별이 그때만 있었던가. 불친절 하지만 적시적소의 주님이다.

  2017년 초등부에 지원하면서 기타 반주를 하게 되어서 아침에 조금 일찍 와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여중 식당 2층이 초등부 예배 장소였는데, 그 어설픈 연습하는 시간에 나오미 어르신들이 주축이 된 예배준비 기도모임이 있었다. 그곳 이른아침 기도를 위해 모이시는 모습에서 어릴 적 추운 방에 불을 지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살면 살수록 신앙이 뭔지 믿음이 뭔지... 뭐라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하지만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나의 신앙이라는 생각은 점점 진해진다. 나는 나의 자녀들에게 내 아버지의 군불과 같은 평생을 두고 따스함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내가 살아가는 모습으로 줄 수 있을까? 예배준비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을 다시 떠올리며 실마리를 잡아본다.

우리 공동체를 위해 늘 기도해주시는 나오미 어르신들에게 감사하며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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