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 이제 그만?
나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이런 표현을 20년 넘은 신앙생활 동안 많이도 들었다.
40대에 접어들어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발견한 것은 바로 신앙이 가진 사회성과 집단성이다. 소위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도 내가 보기엔 절대 '개인적인' 차원의 상황이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오는 과정에서 베다니 마을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묵상하면서 좀 더 명백하게 다가왔다. 베다니 마을 사람들은 함께 나사로의 소생을 지켜보았고 함께 변화되었다.
빛나는 별을 보고 예수의 탄생을 알았던 목동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예수가 부활 후에 무덤을 찾은 여인들도 혼자가 아니었다.
바울이 3일간 눈이 멀었을 때 우리는 그의 눈이 먼 상황을 주목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그의 변화를 지켜본 동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지만, 그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때 그의 아내 십보라의 행동을 보면 그가 절대 개인적인 차원의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았음을 보게 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모세의 출애굽과 광야의 40년 그 자체가 집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콘텐츠를 하나하나 벽돌 쌓아나가듯이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최근 공동체에서 들은 말씀 중에 들은 '변증가의 삶, 증인의 삶'이라는 키워드로 한동안 묵상을 했다.
나는 그동안 나름 신앙의 영역에서 '내가' 공부하고, 변화되고, 남에게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이런 생각을 하며 신앙의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지금은 그게 아닌 것 같다. 증인의 삶은 혼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재판장에 출석한 증인은 어떤 상황에 '귀속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사건에 아무 상관없는 이가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난 어떤 곳에 내 발을 내딛지 않고 먼발치에서 동의 또는 반대만을 생각하는 배심원으로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그게 본질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도 언젠가 모세가 보았던 불타는 가시떨기나무와 같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 더 이상 나만이 아닌 내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모세도 40년이나 걸렸으나 그때가 오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