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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의권 Dec 09. 2018

하나님이 더 실제적이다

과부, 고아와 나그네 -  하나님 뜻에 순종한다는 것

17년 12월 8일의 묵상


스가랴 7장 8-11절

여호와의 말씀이 스가랴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진실한 재판을 행하며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말며 서로 해하려고 마음에 도모하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이 세상 속에서 어떤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 구절에 근거하여 이런 것들을 나열하고 싶다.

의롭고 올바른 재판을 해라.

서로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라.

과부와 고아와 외국인과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라.

다른 사람을 해칠 마음조차 품지 말라.


20대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그때부터 많이 들은 표현들.

예배를 회복해야 된다,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

이런 표현들이 어느 때 인가 구체성 없는 구호로 들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더 실제적이고 현실적이며 직장에서 하는 말로 '실무적'이다.


'매일성경'은 치열한 경쟁의 성경묵상 서적 시장에서 군더더기 없는 구성으로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것 같다.

나는 그중에서 아이들과 함께 하기 때문에 어린이 매일 성경을 보고 있기도 하다.

옆에 '결심하기'라는 부분에 '변화와 순종이 없는 예배는 아무리 많이 드려도 헛된 것'이라는 문장이 있다.

무엇이 변화와 순종인가, 어떻게 해야 변화되고 순종하는 것인가?  

스가랴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적용을 말한다.

과부와 고아를 돌보라고. 우리보다 하나님이 더 실무적이다.


위의 것들은 모두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회적인 형태, 공동체적 형태의 요구와 실천 사항이다.

진실한 재판.  

법정에서 재판하는 사람들만이 아닌 무엇이든 결정할 힘 있는 자들의 행위, 따라서 이것은 정의 이전에 권력의 문제이다.  전 대법원장의 재판 거래 의혹처럼.  추가로 이익집단적인 현실 정치권력의 뿐만 아니라 넓게는 갑질도 포함될 법하다.


서로 인애와 긍휼을 베풀며.

특히 한국사회의 '서로' 뒤에는 '비교와 경쟁'의 구도가 따라붙는 경우가 많다. 사촌이 부동산을 구입해도 복통을 경험하고, 옆집 자식과 자기 자식의 학교 성적을 비교(당)해야 되는 한국사회에서 이것은 마치 DNA의 한 부분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자살률 1위의 국가에서 그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단지 내일 생존의 수단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떤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서로'의 상황 때문이 더 많지 않을까?


과부와 고아.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인간 공동체 안에서 모든 약자의 대표이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는 교회도 알려지지 않은 영역에서 하는 일들이 많다.


나그네.

어떤 공동체에 적응이나 궁극적인 소속을 보장받지 못하는 소위 '넘지 말아야 될 선'이 얼굴 위에 그어진 사람들. 오늘날 한국에서는 제주도의 난민들도 포함될 것 같다.


이러한 것들은 교회 담벼락 안에만 있으면 찾기 어렵다.

교회가 종교 활동을 판매하고, 회원 가입한 이들이 그것을 구매하는 형태에서 과연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순종을 할 수 있을까?


이권이 개입되는 세습을 용인하고 물질을 사유화하는 공동체의 리더십을 성경적인지 비성경적 인지도 판별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그 집단을 유지하는데 관점이 있는'회원'들이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몇몇 리더십들의 '일탈'이전에  읽고 듣고 묵상한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떻게 뿌리내려야 하는지, 그 실천(순종)의 방향과 대상을 다시금 바로잡지 못한다면 계속 반복될 것 같다.

우리는 세상 국가와 하늘나라의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있고, 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종이라는 이중 신분도 가지고 있다. 성도(Saint)는 이 두 가지 구도에서 모두 살아가야 한다.  



이런 잘난 척하는 글을 구구절절이 적었지만 나의 삶으로 돌아오면 아내와 자녀들에게 해야 할 '순종'도 버겁다. 그래서 우리 부모들이 고된 삶 속에서도 새벽기도와 철야기도를 했던 그 간절함의 심령이 허락되기를...

주의 긍휼함을 구하지 않는다면 과연 성도인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과 그것에 대한 순종.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현대교회가 바라마지 않는 것은 결국 초대교회이지 않은가.


세상의 큰 범주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입만 데고 내가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욕먹지 않는 사안이다. 이른바 키보드 워리어.

말씀에 비추어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만 변화되지 못한 내가 그 속에 무방비로 뛰어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의 변화가 어느 수준이 되어야 할 수 있다고 스스로 규정하지 않는다.

모세가 40년 동안 훈련받았다? 그는 40년 동안 그냥 아무런 계획 없는 양치기였다. 내가 나를 어떻게 판단하든 언젠가 나를 부르실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모세와 같이 반응(순종) 할 수 있기를. 사실 모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큰 위안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심이라는 것을 '믿쑵니다~'로 마음에 다짐하는 것이 아닌 이성적인 수준으로 마치 '팩트체크'와 같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야 일 년이나 지난 묵상의 글이 이렇게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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