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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의권 Dec 09. 2018

양치기 중년

교회가 광야의 양치기가 될 수 있을까?


근무지에서 주말 근무가 걸리면 여기서 주일을 보내기 위해 숙소 근처에 나름 규모가 있는 교회에 나가고 있다. 우연히 그 교회 40주년 기념주일이 되어 설교시간에 백발의 원로목사님이 강단에 올라왔다. 

40대에 교회를 개척했으니 이제 80대에 접어든 분이 8절이나 되는 로마서 본문을 교독하지 않고 또박또박 설교자로서 직접 다 읽고 설교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40주년 기념 예배이다 보니 간간히 오는 나로서는 그다지 메시지 자체에 관심은 없지만, 이 교회의 창립과 지난 세월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전면 스크린에 보이는 80년대 90년대 사진을 보면서 이 교회를 둘러싼 지역의 상황을 생각하며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지금 일하는 곳은 여천공단이다. 1997년 여천군, 여천시와 여수시가 통합되었다. 지금 숙소가 있는 동네는 여천공단의 개발의 역사와 평행선을 그리는 곳이다. 공단터에 이미 살고 있던 주민이 이주해 온 곳이기도 하고 공단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다 보니 공단 일과 관련된 외부인들이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이곳에 터를 잡고 지낸다. 그러면서 이곳의 역사를 하나하나 살펴가던 중에 그것이 이 교회의 역사와 맞물려 있음을 오늘 보게 된다. 


이 교회는 이른바 대형교회라 할만하다. 5000명은 족히 들어갈 본관에 부속건물까지 있다. 오늘 보니 30주년이 되는 때에 건축한 것 같다. 이 교회의 태생도 여천공단에 일터를 둔 어떤 기업, 00화학이라는 회사의 강당 같은 곳에서 출발했다. 개척과 1,2차 성전건축 당시의 배경 사진을 보면 지금은 거주지로 빼곡한 언덕이 구릉지 산 중턱이었고, 20주년 당시에는 여수의 큰 체육관을 빌려서 7000명이 운집하는 전도집회도 했다고 하니 놀랍다. 하지만 이곳에 처음 왔을 때의 인상은 좋게 말해 조용하고 아무리 9시 예배라고 하지만 빈 곳이 더 많은 예배당 의자, 그리고 젊은이와 아이들을 찾아보기 힘든 그런 곳이었다.   


메시지의 말미에 원로목사의 아쉬움이 절절히 묻어 나오는 말이 있었다. 30주년 때만 해도 많은 기념행사를 했는데, 지금은 ‘침체된 분위기’라는 표현을 했다. 설교를 마치고 부목사의 광고시간에 ‘40년이면 청년’이라는 표현을 했다. 문득 40대라면 상식적으로 중년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이것 또한 청년과 같은 역동성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지금 상황에 대한 속내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지금 있는 숙소가 있는 동네 원룸에 공실이 많다. 지금 이곳도 ‘한때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 동네 골목에 90년대 초반에나 그전에 시공되었을 널찍한 보도블록이 아직도 깔려있고 비가 오면 지뢰같이 작동한다. 

무엇을 교회의 침체라 말할 수 있을까? 여기뿐만이 아닌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개발도상국 시절의 가파른 성장곡선을 함께하며 밝은 빛을 내고 그 빛에 이끌려 사람들을 모이고, 그 빛을 통해 성경적 가치관으로 삶의 변화를 이끌어내든지, 그 빛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하였든지, 그렇게 모인 사람들로 많은 일들을 해왔다. 그 일들의 긍정적 성과가 지금은 교회라는 포장지가 보이지 않을지언정 이 사회 어디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있고, 부정적 결과는 오히려 교회라는 발송지 꼬리표를 뗄 수도 없고 교회의 본질적 가치를 의심하게 하는 외면할 수 없는 뉴스로 종종 우리의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고도성장 시기가 지나간 것처럼, 주목할 만한 밝은 빛만 바라보는 시대는 지난 것 같다. 밝은 빛이 비치는 곳은 그만큼 그늘진 곳도 함께 더 뚜렷이 보이기 마련인데 교회의 사명중 하나가 그 그늘에 손을 내밀었음을 수천 년의 교회 역사는 이미 보여주었다. 어둠 가운데서는 빛을 주시하고 방향을 잡고 그곳으로 가야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계속 밝은 빛만 바라본다면 오히려 눈이 멀고 말 것이다. 눈을 아래로 옆으로 돌려 그늘진 곳을 찾아들어가 그곳을 비추는 것. 그런 곳에 쓰이는 빛은 기세 등등하게 눈이 부신 것이 아닌 작고 바람 불면 꺼질듯한 촛불 같지만, 저주의 형틀에서 흘린 구주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한 선홍핏빛의 지워지지도 잊혀 지지도 않는 그런 빛이어야 할것 같다.


어려운 시절,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어두운 밤 좁은 골목길로 귀가하는 지친 인생들에게 길잡이 같이 비추던 가파른 언덕위 작은교회 십자가들이 이제는 대로변의 높고 눈부신 첨탑위에 세워지면서 오히려 사우른의 눈 같이 세상을 판단하듯이 내려다 보고 있지 않은가. 


그 원로 목사님의 설교에 모세가 첫 40년을 왕자로, 둘째 40년을 광야의 양치기로 그리고 세번째 40년에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다고 했다. 모세의 인생에서 광야에서의 40년을 폄하하는 사람은 없다. 이 교회가 모세의 두번째 40년에 들어서고 있다면, 그리고 한국의 교회가 그런 시기에 접어들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복된 것이 아닌가? 그 교회는 그렇다 치고, 나에게도 중년의 나이에 양치러 가라고 하면 갈 수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 8년차, 어쩜 이미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임대료 채우기 빠듯한 소상공인, 88만원 세대보다 더 치열한 취준생들, 집한채 마련은 커녕 매년 오르는 전세로  대출을 받아야 하는 가정들. 이런이들에게는 왕자로서 화려한 시간도 없이 바로 광야로 내던져진 삶을 살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언제 끝날지 몰라도 이 시기를 거치고 나면 가나안 땅으로 갈 길에 접어들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건 마치 신앙적인 차원의 희망고문일까?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신이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은 상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그의 모습은 그냥 양치기에 불과 했다고, 왕자의 권위는 커넝 말을 더듬는 인생의 황혼기를 앞둔 희망없는 사람이었다고. 고달프고 무미건조하고 차별성 없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40년이었지만, 결국 주님은 모세를 불러내었다.

 

어쩌면 광야보다 더한 ‘헬’ 접두어가 붙는 현실에서 양치기 같은 삶을 묵묵히 살아낸다는것 자체가 모세가 했던 광야의 삶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라고, 어쩜 이것이 오늘날의 일상의 부흥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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