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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의권 Dec 09. 2018

빛과 소금의 모순

교회에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

교회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 

방향 지향적인 빛, 실천 지향적인 소금, 두가지의 무형과 유형적 가치


우리는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것에 시선을 돌리고 주목하게 되며, 우리가 그것에 이끌리게 되며 그 빛이 움직인다면 우리는 그 빛에 이끌린다. 빛이 널리 먼곳까지 보이기 위해 높은 곳에 두게 된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다가 말 아래에나 침상 아래에 두겠느냐? 등경 위에다가 두지 않겠느냐?"


가로등을 길 바닥에 내려 놓고 작은 촛불이라도 높은 곳에 둔다면 어둡고 먼곳에서 무엇이 먼저 보이겠는가? 그래서 빛 자체의 탁월함 보다 빛을 어떻게 두는가가 중요할 수 있다. 


소금을 만들려면 바닷물의 물기를 증발시켜야 한다. 그것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사람의 노력도 필요하다. 소금을 만드는 사람은 소금 맛의 땀을 흘려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하얀 소금 결정은 손에 쥐어지는 무형의 물질이 된다.

하지만 그것이 손이 아닌 혀에 닿아 수분에 녹아들며 그 결정이 없어질때 비로소 다시 우리 몸에 녹아드는 짠맛을 낸댜. 소금은 그 형체를 없애는 과정에서 그 역할을 이뤄 낸다.

 

빛과 소금. 이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서 그것이 가진 자연적인 물리적 특성만 이렇게 단순히 생각해 봐도 교회가 이 표현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빛을 가지고 빛을 발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교회에서 나타나는 빛은 그 등불을 가진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빛이다. 우리 사람은 본질적으로 빛이 아니다. 우린 주어지는 빛을 손에 받아 쥐고 높이 들어올릴수 있을 정도의 근력과 어디를 비출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는 지성 그리고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 근력, 지성과 의지가 어떤 사람의 탁월함에서 비롯될 수 있겠으나 비추고자 하는 빛의 가치와는 절대 비할 바가 못된다.  오히려 때론 그 사람의 탁월함이 그 빛을 가리기도 한다.


교회는 왜 소금 결정에 녹지 않을 것 같은 비닐코팅으로 교회이름을 세겨 넣어 세상에 뿌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소금을 받아든 사람들이 입에 넣었을때 약간의 소금 맛에 입에 걸리는 소금이 아닌 그 무엇때문에 오히려 다시 그 소금을 입에 넣지 않는 경우를 본다. 

형체를 비우는 본질적인 맛을 어쩌면 우리 스스로 모르기에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찬란한 빛을 높이 지켜들지만 정작 자신은 빛의 역광과 그늘속에 존재하며, 육체가 으스러지듯 돌밭에 소금을 뿌리는 듯한 무의미해 보이는, 하지만 역사에 큰족적을 남긴 이들의 증거들을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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