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의권 Feb 05. 2018

누가 돌을 옮겼는가?

구원은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들어간 지 4일 되어서야 베다니에 도착한 예수의 행적은 상식적이지 않다. 상을 당한 가족들을 만나 그들을 위로하려고 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에게 손님 접대로 예수에게 불평을 한 적이 있던 마르다가 이번에도 버선발로 뛰어 나가듯 밖에서 예수를 먼저 만나 왜 이제야 왔냐고 따지는 자리에서도 '부활이요 생명이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다소 길거리에 마중하러 나온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설교 같은 말을 한다. 그러고도 이번엔 아예 나사로의 집으로 갈 생각도 하지 않고 마르다를 시켜 마리아를 밖으로 불러낸다. 마리아가 집에서 예수를 만나러 밖으로 나오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나선다. 예수는 뭔가 생각이 있었다. 사실 그것은 베나디로 출발하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제자들에게 나사로의 죽음을 알린 후에 하는 말이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죽었는데, 너희를 위해 기뻐한다니?


    동내 주민들까지 이끌고 나타난 마리아를 만난 예수는 그제야 슬퍼하는 동네 사람들과 마리아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며 문상객으로서의 진면모를 보이시는 듯하다. 그때 마침 어떤 이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나' 고 하자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라고 예수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듯이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예수는 나사로를 불렀고 그는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렇다, 예수는 원래 문상객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누가 돌을 옮겼는가?' 이것은 책 제목이기도 하다. 프랭크 모리슨이라는 저널리스트가 자신의 예수 부활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가는 과정을 적은 책이다. 예수의 부활과 나사로의 부활을 과정을 견주어서 말한다는 것이 가당치 않지만 한 가지 같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당시 바위를 파내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후 입구를 무거운 돌로 막는 매장 방식을 따랐다는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여 무덤 밖을 나오기 전 그 무덤의 바윗돌은 천사가 옮겼다. 그럼 나사로의 무덤 돌문은 누가 치웠나? 마리아를 따라온 동네 사람들이다. 물 위를 걷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눈먼 자를 뜨게 하던 그리고 이제는 죽은 자를 일으키실 수 있는 예수, 그가 나사로를 부르시기 전에 좀 친절하게 포스를 발휘해서 돌문을 저리 휙 던져 버릴 법도 한데 굳이 '돌을 옮겨 놓으라'라고 하신다. 


    돌문 주변 시각을 좀 더 광각으로 넓혀 돌문을 치우기까지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면 예수는 마치 준비된 시나리오대로 연극을 지휘하는 연출가이자 동시에 무대에 선 주연배우 같다. 하지만 이 인간 부활 사건의 진행은 예수라는 탁월한 한 주연배우와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 없는 일용직 엑스트라가 아니라, 나사로의 삶터 주변에서 일상을 함께 부대끼며 살아온 사람들, 함께 울고 비통해하며 마치 억울하다는 듯이 예수를 향해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나!"라고 외치는 뚜렸히 배역이 드러나는 이웃들과 함께 진행되었다. 바로 그들이 돌을 옮겼다. 무거운 돌문을 마을 사람들이 힘겹게 땀을 흘려 옮긴 후에, 예수는 나사로를 불렀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본 모두가 예수가 '믿게 하려 한' 사람들이 되었을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의 기적들 중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이들을 치유했던 상황들을 떠올려 보면 그들의 주변에도 돌문을 옮긴 이들과 같은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가시적으로는 지붕을 철거하면서까지 중풍병자를 예수 앞으로 데리고 온 이들이 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성전 미문에서 40년 동안 살았던 장애인들은 당시 사회의 영적인 무기력과 완악함의 상징적 희생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과연 혼자서 그렇게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을까? 무덤 돌과 같이 움직일 수 없는 몸을 가진 그들이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고 살아가게 해 준 것은 그들 주변의 사람들이지 않을까?

2017년 또한 자살률 세계 1위를 기록한 한국사회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당시 예수살렘은 밑바닥 인생에게도 목숨을 부지하면서 살아갈만한 희망이 있는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어쩌면 구원은 그 자체가 개인의 문제나 상황이 아니라고. 나 혼자 하나님과 잘 먹고 잘살고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게 구원이 아니라고. 지금 내 구원도 오로지 내가 하나님 믿어서만 된 것이 아닌 내 앞에 있던 돌문을 누가 치워준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도 나는 돌문 밖의 언제나 눈부신 그 빛에 이끌려 휘청거리며 돌무덤 밖으로 걸어 나가는 중임을 발견한다.





작가의 이전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