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의권 Jan 06. 2018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의미

사람은 궁극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2016년에 읽은 책중 사피엔스라는 이른바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책이 있다. 두꺼워서  다 읽지 못했지만 저자의 한 가지 연구 중에 주요한 한 관점, 사피엔스가 인간 진화의 여러 가지 종류 중에 현존 인류의 조상이 되었던 것은 그들이 사회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자기들의 존재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다른 인간 종들보다 우월했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인문학적 접근이든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접근이든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늘 재발견 해왔다.


나의 관심은 성경을 바라보는 데 있어 이러한 인간관계의 관점이다. 

오늘도 매일 성경의 사도행전 3장의 성전 미문에서 오랜 시간 장애인으로 지낸 걸인을 치유하는 사건을 본다. 그것과 더불어 이러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고 치유하는 신약의 이야기들을 보면, 그곳의 주된 배역들, 예수와 그의 제자들 너머 주변 정황에 있었을 법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언젠가부터 지속적으로 공동체적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면서 생긴 관점이다. 


성전 미문에 있던 그 걸인이 태어나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었지만, 무슨 연유에서든 그는 성인이 될 시점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과연 혼자서 부자유한 몸으로 구걸을 통해서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살 수 있었을까? 물론 자세한 것은 모른다. 자식을 걸인으로 밖에 둘 수 없을지라도 타고난 집과 부모가 있을 수 있다. 그들에게 의지해서 살아왔을 수도 있다. 그가 사도들을 만나기 전까지 그가 성전 미문에서 삶을 연명하는 차원이었을지언정,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둘러싼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가 있었지 않을까?


어제는 열왕기상에서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친자확인 소송의 장면을 설교로 들었다. 예전에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그 이상의 관점을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찬찬히 두 여인의 송사하는 과정과 정황을 들어보니 그들은 매춘부였고, 집에 두 사람만 살고 있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아 두 사람이 키워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이 두 여인 외에 이 상황에 대해서 증언을 하거나 참고인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당시 그러한 직업을 가진, 그것도 여성의 증언은 증언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그들이 주변 사람들과의 어떤 관계없이 살아가야 했다는 그 자체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결국 거짓증언을 한 것으로 드러나는 한 여인-아이를 반으로 갈라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을 보면 두 여인이 한 집에 살지만 전혀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는 상황이지 않겠는가?  솔로몬의 지혜보다 다윗을 거쳐 솔로몬의 시대에 이르렸지만 홍등가와 매춘부가 있는 당시의 사회상이 역설적이라는 목사님의 해설을 들으며 더 깊은 고민 수준의 묵상이 필요함을 느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과연 그들만의 역량과 영향력으로 역사적인 사건의 주인공으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순신의 탁월한 리더십에 이견은 없으나 그와 함께한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존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우리가 아는 역사적 인물은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서야 할 시상식에서 시간 관계상 말하는 '000 외 몇 명'에서 쓰이는 대표 수상자로서 봐야 하지 않은가?

에디슨이 발명 뒤에 그의 외골수적인 삶을 지켜본 가족이 있었고, 헬렌 켈러의 설리반 선생은 그나마 알려졌지만 그녀의 성장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함께 격은 가족과 주변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5.18 광주의 시민들, 프랑스 대혁명의 수많은 피 흘린 군중들, 단지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모를 뿐이지 그들이 역사를 만들었다.

천안문 광장에서 탱크 앞을 가로막았던 그의 용기는 혼자만의 힘이었을까? 그 뒤에 보이지 않는 군중의 중력이 그를 버티게 하지 않았을까? 1987년의 이한열 열사의 죽음 뒤에 거리를 매운 군중들, 2016년의 촛불의 거리에서 자기 얼굴과 이름 없이 섰던 그들이 역사의 주인공이다. 


사람이 먼저다. 이것에 덧붙이고 싶은 것은 '관계가 사람이다'. 나는 무엇에 관계하는가? 

뻔한 모범정답 같지만 다시 돌아오는 '경천 인애'이다. 하늘을 사랑하고 하늘이 사람을 사랑하듯이 나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새로운 것은 없다. 

이미 수천 년 전의 해묵은 말씀이 늘 새롭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 식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