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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인 May 24. 2021

감정의 유통기한

상하면 아무도 안 먹어요

 카페 노동의 끝 점심 러쉬가 지나고 한산해질 무렵, 어김없이 그 날의 우유가 들어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제 들어온 우유가 아직 열 팩이나 남아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빼고, 새로 들어온 우유를 차곡차곡 안 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열 팩의 우유를 유통기한이 잘 보이도록 바깥으로 세워 놓았다. 사실 이 정도의 우유는 기한 내 모두 사용된다. 오늘 들어온 따끈따끈한 우유를 먼저 써도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냥 그대로 넣어 버릴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매니저가 몇 번이고 선입선출을 강조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매번 생각에서 그쳤다.
 그런 나여서 일까. 그 말을 듣고도 한참 생각했다. 그녀의 의도를 내 머릿속에서 찾아내려 애썼다. 혼란 속에서도 매일 같이 새로운 감정들이 쌓여갔다. 잠시 후에 정리해야지, 정말로 조금 있다 들여다봐야지 했던 것이 어느새 문을 닫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그제야 들여다보니 막상 그 속엔 내용물보다 여기저기 물이 맺혀 지저분하게 얼은 성에만 가득했다. 겨우 그것들을 걷어내고 깊숙한 곳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들어온 지는 꽤 되었지만 아직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았어. 겉은 좀 낡았지만 내용물은 그대로야. 이제라도 내 말을 들어줘. 바깥에 있던 그 무엇보다도 사실 이게 가장 먼저였어."
 감정을 표현하는데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는 성가시더라도 그것을 뒤로 밀어 넣지 않았을 텐데. 나는 결국 상한 우유를 마셔 배탈이 났다. 우유를 상하게 둔 것도, 그것을 마신 것도 나였기에 꽤 긴 시간 홀로 앓았다.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나서야 표현하는 건 자신은 물론 상대에게도 못 할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유통기한 1일마저도 넣고 빼고를 반복하며 정렬했던 나는 요즘 상처 받았을 때 미워하고, 늦지 않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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