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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의림 Sep 13. 2023

우리의 결혼은 평등할 수 있을까 (4)

반반의 살림


약 5년의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 부부의 부부싸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살림 분담'. 사실 싸움이라기 보다는, 늘 내가 먼저 화가 나서 Y에게 불만을 와다다다 풀면 Y가 해명을 하거나 사과를 하는 식이었다.

30년 동안 따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보니 식습관이나 생활 패턴, 청결관념 등에도 사소한 차이가 여럿 있었다. 예를 들어, 난 택배를 집 안에 들여 뜯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데 Y는 집안에 스스럼 없이 들여놓곤 했고, 내가 한 소리를 하면 ???? 표정을 짓곤 했다.


차이 유무와 별개로 청소나 정리에 있어서 나의 민감도가 Y의 것보다 높았다. 어디 가서 특별히 깔끔하다 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고 본가에서 원가족과 함께 살 때는 청소든 설거지든 부지런히 해본 적이 없는 나인데, Y에 비하면 나는 꽤나 깔끔 떠는 사람이었다.


일상적인 결혼 생활에서 부부간에 분담할 일이라곤, 사실 집안 살림 말고는 없다. 둘 중 한 명만 바깥일을 한다면 다른 한 명이 집안 일 대부분을 책임지면 되지만, 둘 다 바깥일을 한다면 집안 일도 함께 하는 것이 평등한 부부생활의 어쩌면 가장 중요하고도 명시적인 지표이기도 하다.


결혼할 당시, 나는 로스쿨 학생이었고 Y는 낮에는 직장에 다니고 밤과 주말에는 노무사시험을 공부하며 주경야독하는 사회인이었다. Y에 비해서는 내가 상대적으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Y는 두 가지 일을 병행하고 있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청소, 설거지 등 사소한 집안일을 더 많이 챙기게 되었고, 처음에는 이것을 그럭저럭 받아들였다.


그러나 Y의 청결 민감도는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수준 이하로 낮았고, 어느 순간 Y는 내가 지시하지 않으면 청소도, 설거지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설거지는 하루 한 번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Y는 일주일에 몰아서 한 번 해도 되는 사람이었고(사실 그 이상도 참을 수 있을 거다), 내가 집 전체 청소를 일주일에 한 번은 해야하는 사람이라면 Y는 한 달에 한 번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Y에게 집안일을 하라고 했다가도 Y가 하기 전에 내가 참지 못하고 먼저해버리는 상황이 반복됐고, '늘 집안일에 레이더망을 켜고 신경쓰고 지시하는 사람도 나'라는 사실이 나를 화나게 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가 변호사시험을 보기 약 6개월 전부터 Y가 대부분의 집안일을 전담해주었고, 이에 Y에 대한 불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르르 가라앉았다.


그러나, 내가 변호사가 되어 취업을 하고 바빠지면서 또 상황은 달라졌다. 잠자는 시간과 육묘하는 시간을 빼고는 거의 일에 파묻혀 살다보니 주방은 방치되고 한 달에 한 번은 하던 화장실 청소도 더 하지 않게 됐다. 그밖에 알러지 케어를 위해 침구를 빤다든지, 어지러운 옷방을 편리하게 정리한다든지, 이전 같으면 내가 먼저 신경쓰던 일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서 이전과 같이 일주일에 한 번 청소를 할 순 없어서, 밤에 집에 돌아오면 매일같이 청소기를 돌렸고, 이것은 이번에도 청결 민감도가 높은 내 몫이었다.


내가 변호사 일을 시작하기 전엔 주말에는 최소한 밀키트라도 사서 집밥을 먹곤 했는데, 일을 시작한 후에는 주말에 시간이 나더라도 도저히 무언가를 할 기력이 없어서 대부분 외식을 하거나 배달음식을 시켜 먹었다. Y는 '건강하게 잘 챙겨 먹는 일'에도 딱히 관심이 없는 편이었기 때문에 내가 음식에 신경을 쓰지 않자 자연스럽게 가정 내 식사의 질이 현저히 낮아졌다.


그렇게 변호사가 된 후 1년 3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나는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한 회사로 이직을 했다. 내가 이직하기 직전, Y는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매우 바빠져서 저녁과 주말이 없는 생활을 시작했다.

난 저녁에 여유가 생기자 이전에 비해 집안일에 다시 좀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Y가 극한으로 바빴기 때문에 또 자연스럽게 내가 대부분의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 3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그 사이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극한의 입덧에 시달리고 있었다. 입덧에 시달리면서 또다시 청소 외의 집안일을 손에서 놓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저녁에 청소를 마치고 고양이 밥을 주고 입덧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늘어져 있는데 눈물이 흘렀다.


'50대 50의 분담은 더 이상 바라지도 않아. 그건 가능하지도 않으니까. 근데, 왜 내가 더 바쁠 때도, 내가 덜 바쁠 때도 사소한 집안일에 레이더망을 켜고 있는 사람은 왜 나인 거지?'


약 7, 8개월 후면 아이가 세상에 나올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도 이런 불만이 지속될까봐 두려웠다. 정확하게는 출산 후 바쁜 일상과 아이가 불러올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불만이 Y에 대한 애정까지 잠식해버릴까봐 두려웠다.


일전에 생활 패턴이 다른 친언니와 사는 친구가 엑셀로 집안일을 정리해서 나눴다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아있었고, 그 이후 종종 남편에게 "집안일 누가 더 많이 하는지 엑셀로 정리해서 한 번 볼까봐?" 반농반진으로 이야기하곤 했는데, 이제 진짜 엑셀로 집안일을 정리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남편 퇴근 전에 엑셀로 집안일을 리스트업했다. '굴러다니는 쓰레기 정리', '식재료 고민' 등 까지...

내가 살림꾼이 아니어서 그 목록이 아주 디테일한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하는 일이 Y가 하는 일의 두 배를 조금 넘었다(물론 이것도 내 눈에 보인 것 기준이니 Y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 있고, 실제로 Y가 내가 적은것 이외에 더 한 것들도 있다고 하긴 했다.).


Y가 퇴근한 후,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Y는 내가 "할 얘기가 있다"고 할 때마다 늘 그렇듯 살짝 긴장한 채로 소파에 앉았다. 나는 요즘 내가 입덧 때문에 육체적으로 힘든 것뿐만 아니라 당신에 대한 애정이 식을까봐 두려운 마음에 심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이유의 본질적 원인은 단순하게 말해서는 살림 분배,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이를 낳고 내 커리어를 일궈나가는 데 Y가 나를 서포트해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는 생각이 요즘 들어 든다고 말했다.


그리고 엑셀정리표를 보여줬다. "50대 50으로 분배하자고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당신보다 집안일에 더 민감하기도 하고 지금은 내가 좀더 여유로우니까. 다만, 당신도 내가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 집안일에서 챙겨야 할 것들이 어떤 게 있는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봐. 그래야 내가 나중에 바빠졌을 때 당신도 나를 내조할 수 있는 거고."


Y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당신이 하는 일이 더 많았다. 나에게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고맙고, 당신을 심적으로 힘들게 한 것은 미안하다.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나의 문제제기와 내 마음을 수긍하고 사과했다. 늘 그렇듯 난 Y가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90%정도 풀렸다.


이후 Y에겐 많은 발전이 있었다. 내가 뭔가를 해달라고 얘기하기 전에 사소한 집안일들을 챙기기 시작했고, 특히 본인이 분배하기로 한 것에 대해서는 미루지 않고 하기 시작했다.


결혼생활을 하기 전, 그리고 결혼생활 초에는 50대 50에 대한 강박이 있었다. 그렇게 분배해야 평등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덜 바쁜 사람이, 그리고 청결에 더 민감한 사람이 좀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다만, 집안일이 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부부 두 사람 모두의 일이란 사실을 두 사람 모두가 인지해야 한다. 관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는지 파악해야 하고, 일상의 파트너로서 상대방의 부재가 생겼을 때 내가 그 부재를 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로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도 상대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큰 불만 없이 집안일을 챙길 수 있고, 상대가 내가 하는 몫을 확실히 알고 인정해준다는 것을 알기에 좀더 사랑받는다는 느낌으로, 자긍심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일들을 마음 편하게 처리해나갈 수 있다.


그 이후 거의 9개월간 집안일 분배로 다투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내가 변호사시험을 준비하던 기간을 제외하곤 최장기간 다투지 않은 기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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