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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의림 Sep 28. 2023

둔촌주공의 생애를 읽은 등촌 주공 키드의 회고

**글쓴이는 등촌주공키드고, 읽은 책은 둔촌주공에 관한 것입니다.


1989년 5월에 태어나 1993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강서구에 살다가 2023년 5월, 다시 강서구로 돌아왔다. 대림동에서 태어났지만 23년을 산 강서구는 내게 고향이다.


다시 돌아왔을 때 강서구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봄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크게 울고 비닐하우스 오리고기집들이 있던, 등촌3동에서 방화동과 김포공항으로 이어지는 길엔 식당들과 오피스들이 즐비한 높은 건물들과 대학병원, 대기업 연구단지가 들어섰고 호당 10억대를 호가하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섰으며, 일산 호수공원 부럽지 않은 서울식물원과 메리어트호텔 보타닉파크까지 들어섰다. 10년 전만해도 '서울에서 스타벅스 하나 없는 동네가 여기 말고 또 있을까'라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자본과 대도시의 상징인 스타벅스도 곳곳에 들어섰다.


기분전환하러 멋진 카페에 갈 수 있고 주말에 어렵지 않게 초록이 무성한 공원에서 산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점이 생겼지만, 나에겐 이 변화가 좀 낯설다. 만약 나의 아이를 이 지역에서 계속 키우고 학교까지 보낸다면 '먹고 사느라 바쁜 부모들이 많아서 치맛바람 일으키는 게 특이하고 유난스럽게 여겨졌던' 나의 학창시절과 같은 학창시절을 보내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엔 강서구에 산다고 하면 누구도 부동산이나 부(富)에 대해 떠올리거나 이야기 꺼내지 않았지만, 이젠 강서구에 오래 살았다고 하면 "집값 올라서 돈 깨나 번 것 아니냐"는 말을 듣기도 한다.


1993년 3월 부모님을 따라 강서구에 이사온 뒤 가양도시개발아파트 4단지에서 2년 9개월, 등촌주공6단지에서 남은 약 21년을 살았다. 그렇다, 난 등촌주공 키드다. 둔촌주공 재개발 재건축 뉴스를 늘 지나가듯 보면서, '저기도 우리 동네랑 비슷한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작년, 재작년 둔촌주공 재건축 아파트인 올림픽파크포레온아파트 미분양 사태 뉴스를 또 지나치듯 여러번 보았다. 그러다가 최근 「둔촌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라는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공키드로서 한번 읽어보자는 생각에 바로 구매해 읽어보았다.


둔촌주공은 등촌주공과 달랐다. 등촌주공아파트 대부분의 단지가 소형평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와 50년 공공임대 단지, 국민임대 단지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나, 둔촌주공아파트는 20평형대 이상의 중대형평형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일반분양아파트 단지이다.


등촌주공에는 영구임대나 국민임대 등 임대아파트 단지가 많아서 중산층 가구보다는 찐 서민 가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친구 부모님들 중 대기업 직원이나 전문직 종사자를 본 기억이 없다. 택시 기사, 노점상, 중소기업 회사원, 미용사, 보험영업직 등 지금의 내 인적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사람들 중에는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직종 종사자들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내가 입학한 해부터 '초등학교'가 되었다.)에 입학하기 직전, 우리 부모님은 어떤 기관에서 영재 판정을 받은 내가 주공아파트 거주자들만 배정받는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30평대 이상의 아파트 거주자들이 배정받는 학교에 보내기 위해 위장전입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을 잠시 하셨지만, 결국 그런 귀찮은 절차를 거치지 않으셨고 난 내가 원래 배정받아야 하는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 부모님이 수많은 장관 후보자들이 거쳤던 그 위장전입이란 절차를 거쳤다면 나의 학창시절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여튼, 난 주공아파트 아이들만 배정받는 학교에 입학하였고, 어른들이 저 집은 11평이네, 저 집은 17평이네, 저 집은 임대네 저 집은 분양이네, 하는 이야기를 듣고는 살았지만 다 엇비슷하게 못 살아서 이게 중산층 이하의 삶인 것도 딱히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휴거', '전세거지'라는 차별적인 언어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몇몇 선생님들의 차별적인 시선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이것은 차별이라는 본능적인 직감.

호빵같은 볼살이 아직도 달랑거리던 1학년 아이들에게 '한 줄로 서지 않는다'고 복도에서 망설임 없이 싸대기를 날리던 선생님, 물건을 하나 훔친 아이 두 명을 혼낸답시고 1교시부터 6교시까지 쫓아다니며 각목과 실로폰대로 아이들을 사정없이 패던 선생님, 교권이 무너지는 게 문제라는 지금 이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야만이 있었다. 자기 아이가 잘못해서 사정없이 맞았다는 걸 인지한 엄마들은 생계 때문에 바쁜 와중에 겨우 짬을 내어 학교에 찾아와 그저 빌기만 했었다. 어린 나이에도 이런 생각을 했다. '왜 내 아이를 이렇게 심하게 대하냐고 말을 못해? 이건 다 잘 살지 못해서 생기는 일이야.'


이 동네에서 난 특출나게 학업 성적이 좋아서 선생님들이나 학부모들이 다 아는 그런 아이였다. '보기 드문' 아이로 평가 받았고 어떤 어른들은 '꿈을 크게 가지라'고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 동네를 벗어나서 드넓은 세상을 누비는 나의 미래를 상상했다. 지금 떠올려 보면 어느 정도는 '난 이곳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같으면 '휴거'의 삶이라고 받아들여질 후진 나와 주변의 일상이 나에겐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다. 여름이면 문을 열어놓고 사는 복도식 아파트에서 이웃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삶, 장애를 가진 친구들의 부모님을 여느 부모님과 다르지 않게 보는 삶, 같은 학년 친구의 아빠가 오후에 학교 운동장을 누비며 술주정을 부리면 그 순간에는 소리지르며 도망가지만 뒤에서 그 친구를 흉보지 않는 삶 같은 것.


내가 등촌주공아파트에 사는 20여년 동안 젊은 부부와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들의 상당수가 이사를 갔고, 거주자 평균 연령이 점점더 높아졌다. 한 학년에 24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던 모교 등원초등학교의 한 학년 학생 수는 이제 30명도 되지 않는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사기업 아파트들이 점점더 많아졌고, 마곡지구의 아파트는 10억을 웃돈다. 이런 변화 속에서 현재의 등촌주공 키드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나와 내 과거 친구들처럼 나와 너의 일상이 특별히 후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을지, 무엇이든 꿈꾸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


「둔촌 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어린 시절 만난 친구들 개개인의 성격은 모두 달랐지만, 20여 년 후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생활 수준은 엇비슷했던 것 같다. 특별히 잘 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못 살지도 않는 삶. 아마 다들 '이 정도면 보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공아파트 거주자들이 '집단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주공아파트가 '서민 주거 안정'을 목표로 건설된 '서민아파트'라는 인식과 더불어, 경제적 형편이나 가족 구성 등 생활의 면면이 비슷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대단지 생활이 만들어내는 착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건축과 함께 드러난 거주민들의 집단적 '장소 애착'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이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한곳에서 살았던 경험에 기인한 바 크지만, 동시에 같은 공간을 경험한 사람의 수가 무척 많아서 더 널리, 더 쉽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p.100)


여기서 말하는 '생활 수준'은 '아버지가 전문직에 종사하거나 공기업, 대기업 등에 다니고 어머니는 주부인 전형적인 중산층 4인가족'의 것으로 등촌주공아파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생활수준의 동질성은 구성원간 동질감과 소속감을 고취시키고, 구성원들이 차별과 혐오가 제거된 일상의 감각을 공유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이 동질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 그와 같은 판타지는 처참히 무너진다. 등촌주공아파트 주변에 롯데캐슬이 들어서고, 가양도시개발아파트 주변에 한강자이 아파트가 들어오면서, 경제적, 문화적 생활 수준의 차이가 극명하게 가시화 되었고, 혐오와 차별의 언어가 이 동네에 발을 들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고민이 생긴다. 성장기에 동질적 집단 내에서 동질감과 소속감을 경험하는 것이 좋은가, 다양한 세상이 부딪히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좋은가.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면, 그리고 결국 모든 미시적 세상이 연결되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이 이 사회라면 성장기부터 나와 다른 집단을 경험해보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아닌, 공존과 배려의 언어를 배워야만 결국, '너와 내가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자'는 목적에 부합하는 경험이 될 것인데, 지금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은 그 목적과는 점점더 먼 곳을 향해 가는 것 같고...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들고 일어서면 그 집단을 억울하게 만든 대향 집단을 처벌하고 응징하는 방향으로 대책을 세우고, 그 처벌과 응징이 또 다른 억울함은 만들어 내면 또다시 그 대향 집단을 처벌하고 응징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절망의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는 느낌이다.


서대문구, 관악구, 은평구 그 어디를 돌아다녀도 내 고향 강서구만한 곳이 별로 없는 느낌이고, 세월이 갈 수록 내 어릴적의 경험이 나의 가치관과 정체성의 큰 부분을 구성한다는 것을 자각하여 결국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물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고, 그때의 강서구와 지금의 강서구도 많이 다르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살던 과거 강서구 등촌3동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고, 내 정체성의 큰 부분을 구성한 이곳에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장기적으로 찾아가보려 한다.


올해, 내 모교인 등원초등학교 변호사 명예교사로 임명되었고, 조만간 진로특강을 하러 간다. 학교는 어떻게 변했을지, 어떤 면에서 그대로일지, 그곳을 구성하는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 「둔촌 주공아파트, 대단지의 생애」 中 스크랩한 부분=====



주택공사가 건설하고 공급한 이 거대한 단지는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었고, 입주민 역시 결코 '아무나'가 아니었다. 국민의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을 공급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누가 특혜를 받을 수 있는지, 어떤 기획이 지원받고 어떤 사업이 퇴출되는지가 둔촌주공아파트 한 단지에서만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박정희 정권이 그토록 내세웠던 주술적 구호인 "국민총화(國民總


和)"를 위한 '국민 만들기'였다는 주장은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p.39)



1970~1980년대에 대한주택공사에 의해 건설된 주공아파트는 당시의 심각한 주거난을 해소해주는 동시에 낮은 용적률로 쾌적한 거주 밀도를 유지했고, 넓은 녹지와 다양한 부대시설을 함께 조성하려 애썻다. 이는 대한주택공사가 단지 단시간에 저렴한 주택을 최대 물량으로 공급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 대한주택공사의 사훈은 "우리는 복지사회 건설의 사명을 띠고 새롭고 값싸고 살기 좋은 주택을 많이 건설하여 국민 주거 생활 향상에 이바지한다"였다. "새롭고", "살기 좋은 주택"이 모더니스트 집단으로서 지향하던 이상을 드러낸다면, "값싸고", "많이"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였다. (p.45)



둔촌주공의 첫 입주가 시작된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며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1980년 들어선 전두환 정권은 '주택 500만 호 건설'을 선포하며 주택 공급의 양적 확대를 유일한 목표로 내걸었다. (중략) 건축 관련 법규들은 거주성보다는 건설 물량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980년대 들어 건물 사이 거리 규제 조항은 개정 및 보완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완화되었다. 단지 밀도가 증가해 옥외 공간을 줄고 일조권 침해는 늘어 거주 환경의 질적 저하가 심화했다. (p.67)



어린 시절 만난 친구들 개개인의 성격은 모두 달랐지만, 20여 년 후인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생활 수준은 엇비슷했던 것 같다. 특별히 잘 살지도 않고, 그렇다고 못 살지도 않는 삶. 아마 다들 '이 정도면 보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주공아파트 거주자들이 '집단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졌던 것은 주공아파트가 '서민 주거 안정'을 목표로 건설된 '서민아파트'라는 인식과 더불어, 경제적 형편이나 가족 구성 등 생활의 면면이 비슷한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대단지 생활이 만들어내는 착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재건축과 함께 드러난 거주민들의 집단적 '장소 애착'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이는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한곳에서 살았던 경험에 기인한 바 크지만, 동시에 같은 공간을 경험한 사람의 수가 무척 많아서 더 널리, 더 쉽게 퍼져 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p.100)



어린 시절의 이웃을 떠올려보면 생활 수준이 비슷했다. 같은 층에 아버지가 공기업에 다니는 집이 있었고, 부모님이 모두 학교 교사인 집도 있었다. 아래층엔 연세가 지긋하신 동양화가 부부가 사셨다. 학교 친구들은 아버지의 직업란에 대부분 '회사원'이라고 적었고, 가끔 학교까지 갖고 와서 자랑할 거리가 많은 제과 회사나 야구단이 있는 그룹사에 아버지가 다니신다는 아이를 보면 조금 부러웠던 기억이 있다. (p.102)



둔촌주공아파트 거주민들이 이토록 깊은 애정을 가지게 된 것은 그곳이 그들의 '집'이자 '동네'였기 때문이다. 둔촌주공아파트는 거주민이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자, 그 안에 함께 살아가는 가족 또는 이웃과 맺는 관게, 그 공간 자체와 맺는 과계를 포함하는 동네였다. 그리고 '완성형'으로 태어나 수십 년 동안 크게 바뀌는 것 없이 '정지된 마을'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아파트 단지의 숙명도 장소 애착 형성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는 이-푸 투안이 장소를 "정지(pause)가 일어나는 곳"이라고 말한 것과 닿아있다. 사람과 공간의 관계는 정지해 머무를 때 밠애하며, 사람이 아무리 정지해있다고 해도 공간이 계속 변한다면 그곳은 '장소'가 되지 못한다. 둔촌주공아파트가 40년 동안 한결같은 모습으로 머물러 있었기에 그곳에 살았던 이들도 공간과 지긋하게 관계를 맺고 애정을 키울 수 있었다. (p.135)



연식이 20년쯤 된 둔촌주공아파트도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2008년 고층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며 변화한 잠실의 모습이 둔촌주공에 일으킨 동요가 컸다. 동네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둔촌을 잠실과 비교하곤 했다. 원래 잠실은 5단지 빼면 집이 작아서 둔촌보다 별로였다거나, 잠실과 둔촌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둔촌에 집을 구했다 같은 이야기였다. 둔촌보다 '별로'라고 생각했떤 잠실주공아파트는 소형 평형 단지들이 재건축되면서 가격이 폭등한 것은 둔촌주공 거주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쾌적하고 살기 좋은 단지'라는 자부심은 중요하지 않아졌다. 집과 동네에서 누렸던 '거주'의 가치는 점차 잊히고, '명품 단지가 되어야 한다'라는 목표를 내걸고 자신의 집을 개발 이익을 벌어들이기 위한 투전판에 내놓게 된다. 그렇게 둔촌주공아파트는 재건축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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