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존을 버리는 말들

엿 같은 면접의 추억

by 박유진

또 떨어졌다. 면접에 떨어진 기업을 엑셀로 꼼꼼히 정리해놓고 해당 기업에서 판매하는 모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하여 철저히 불매운동을 벌이겠노라 분노와 눈물로 다짐했다. 아, 근데 그러면 우리나라에 살 수 없다. 이민을 가야 한다. 어디로 가야 하나. 김치와 된장찌개를 포기하고 살 순 없는데.. 이번 생은 이렇게 망하는 걸까.


면접을 본 회사는 창원에 있는 공장 딸린 중간 규모의 회사였다. 이미 15번이 넘게 최종면접에서 낙방한 뒤였지만, 무지몽매한 나는 '이번에는 될 거야, 설마 또 떨어질 리 없어' 하며 또다시 허황된 기대를 품었다.


부산에서 창원 성산구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갔다. 버스는 심하게 덜컹거렸고 급발진과 급제동을 반복했다. 대중교통만 타면 멀미를 심하게 했지만 우아하게 택시에 올라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기엔 깜찍하다 못해 끔찍하기까지 한 통장잔고가 떠올랐다. 하릴없이 시외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을 참아 가며 꿋꿋이 면접 예상 질문지를 꺼내 복습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에 도착했다. 면접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큰 테이블에 둘러앉은 면접자들을 재빨리 스캔했다. 역시나 나를 제외한 모두가 잘나 보였다.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들러리로 전락해버릴 내 처지를 잠시 비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차비가 얼만데 면접비 만 원이라도 받아가야만 했다. 속으로 쌍욕을 읊조린 뒤 조용히 테이블 한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보란 듯이 사원증을 매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자가 대기실로 들어와 말했다.


'이제 면접장으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나를 포함한 면접자 6명이 일제히 일어서서 면접장으로 향하는 복도로 들어섰다. 걸어가는 내내 다른 면접자들의 묵직한 발소리와 달리 또각또각하는 가냘픈 내 구두 소리가 이질적으로 복도에 울려 퍼졌다. 망했다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이라도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튈 용기마저 없는 쭈구리였다.


발목에 족쇄를 찬 죄수처럼 어기적 어기적 복도를 걸어가다가 면접장 앞에 도착했다. 그러자 갑자기 군인처럼 힘차고 당당한 모양새를 갖추려고 시동을 거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소름이 끼쳤다. '면접관 앞에서는 힘차고 당당하게 행동할 것' 이제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면접의 비결이었다. 내 몸뚱이는 대뇌의 동의도 없이 즉각 그것을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대충 면접비나 타서 집에 가자는 좀 전의 결심이 무색하게, 면접장 앞에서 나는 또다시 면접스킬 AtoZ를 달달 복기한 노예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채 면접에 임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면접이 시작되었다.


면접관 : 우리 회사에 지원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나 : 저는 OO회사가 지향하는 가치관과 방향에 공감하고, 이 회사에서 제 비전을 펼침으로써 함께 동반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월급이 필요합니다)

면접관 : 간혹 야근이나 주말출근을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나 : 가급적 안 하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으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 같으면 하고 싶겠습니까)

면접관 : 주량은 어떻게 되나요?

나 : 맥주 한 병 정도는 마실 수 있습니다 (알콜 쓰레기, 회식 혐오자는 안 뽑으시겠다?!)

면접관 : OOO 씨는 아직 미혼이신데, 결혼 후 육아는 어떻게 하실 예정인가요?

나 : 요새는 아이 돌봄 등 육아에 대한 국가지원정책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할 예정입니다 (제 결혼과 육아까지 신경 써주다니 너무 감사해서 콧물이 다 나네요)


면접이 끝났다. 광탈을 직감했다. 면접 내내 긴장으로 굳어 있던 온몸이 저려왔다. 면접 예상 질문을 정리한 노트와 자기소개서 등 면접을 준비하면서 모아 온 자료들을 한껏 짊어지고 왔더니 어깨도 아팠다. 터벅터벅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갔다. 아까 회사에서 같이 면접을 본 면접자 한 명이 정류장 앞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슬쩍 그 옆에 앉았다. 면접도 끝나고 긴장도 풀린 덕에 그 면접자와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자격증은 몇 개나 있는지, 토익점수는 얼마인지, 경력이 있는지 등등 서로의 스펙을 견주어 보았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내 스펙이 더 좋았지만, 알 수 있었다. 나는 처참히 광탈하리라는 것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 법이다.


타야 할 버스가 왔다. 꽉 찬 쇼퍼백을 짊어지고 버스 하차문 바로 뒷좌석에 앉았다. 쇼퍼백을 무릎 위로 끌어당겨 옆자리를 비웠다. 마구 낙서된 자기소개서와 정돈되지 않은 종이 뭉치가 무겁게 무릎을 짓눌렀다. 그 시절 내 인생은 무겁고도 거추장스러운 것이었다. 모든 기력을 다한 나는 버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모범 답안들을 할미넴처럼 한바탕 지껄이고 나면 면접이 끝났다. 늘 그렇지만 면접이 끝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뱉으려니 입 안이 텁텁하고 목구멍이 썼다. 답변한 대로라면 나는 회사를 위해서라면 야근은 물론이고 주말출근까지 마다하지 않는 열정을 겸비해야 했다. 친목도모를 가장한 회식자리에서 고귀하신 윗분들의 신성한 말씀-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눈물겨운 성공신화 같은 것들-을 아로새기는 훌륭한 신규가 되어야 했다. 도덕적인 시민으로서 기꺼이 결혼과 출산의 노고에 동참하여 국가의 출산율 향상에 보탬이 됨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육아를 핑계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등을 사용한다며 소란을 피워 직장생활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 그런 미덕을 행할 줄 아는 슈퍼맘이 되어야만 했다.


나는 서서히 망가졌다. 평소의 나라면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말들을 반복적으로 뱉으며 스스로의 자존을 깎아먹던 그 숱한 면접들로부터. 내 언어가 아닌 말들로 301번째 자기소개서를 쓰고, 15번째 면접을 보던 그 시점부터. 취업준비를 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회사의 조건들도 하나씩 하나씩 지워나갔다. '연봉 2,800만 원 이상'을 포기했다. '집에서 출퇴근 가능한 위치'를 포기했다. 일자리의 양질 따위를 고민하는 것은 이미 오래된 사치였다. 이미 포기한 것들과 앞으로도 포기해야 할 것들은 많았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전혀 없어 보였다.


면접을 본지 일주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역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익숙한 상황이었다. 인사 담당자는 탈락자들을 너무나 걱정하고 안쓰러워한 나머지 불합격 조차 알려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마음 씀씀이와 배려가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다 났다. 눈물 콧물을 쏟으며 생각했다. 더 이상 내 입으로 스스로의 자존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나는 사기업 취준생이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공시생이 되었다.


2016년 여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