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어 미팅이 5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와 제이슨은 택시에서 총알처럼 튀어나와 일순간 회사를 향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스타벅스 커피 한 통은 제이슨이, 나머지 한 통은 내가 들었다. 보폭이 조금 더 넓은 제이슨이 나를 앞질러 뛰어가는 게 보였다. 다급히 핸드폰 시계를 봤다. 9시였다. 바이어들이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인생 종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의류 회사에 다니던 때였다. 여성 블라우스를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회사였는데, 고객이 미국 바이어다 보니 바이어 미팅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미국 바이어가 회사를 방문해서 연 단위로 제작할 샘플을 픽하고, 생산시기나 물량 등을 협의하는 미팅이었다.
문제의 발단은 제이슨과 내가 2인 1조가 되면서부터였다. 우리에게는 회의실에 비치할 각종 다과를 준비하고, 바이어들의 점심을 미리 주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바이어는 8명 정도 온다고 했다. 미팅 3일 전 회사 근처 유명 호텔에 전화를 걸어 런치 메뉴를 미리 주문해두었다. 비건이거나 땅콩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 계란 베이스인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 등 취향도 다양했다. 메뉴를 맞게 주문했는지 몇 번씩이나 거듭 확인하며 진땀을 뺐다. 무난한 오일 파스타와 샐러드, 피자, 초밥 등을 섞어서 주문을 마쳤다.
미팅 당일 회의실에 비치할 스낵과 음료는 총무팀에서 준비해준다고 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커피 공수였다. 대리님에게 어느 브랜드 커피를 사 와야 하는지 물었다. 미국 바이어(놈)들은 역시나 입맛이 까다로워 스타벅스 커피만 드신단다. 스타벅스에서 회의용이나 행사용으로 톨 사이즈 기준 아메리카노 8잔 정도가 들어가는 투고 백을 판매하니 그것을 두 통 사 오면 된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니 흡사 몽고간장을 담아놓은 통 같이 생겼다.
그런데 커피는 미리 사두면 맛이 없으니 전화로 예약을 해두고, 미팅 당일날 아침 일찍 스타벅스를 들러 픽업을 해와야 했다. 제이슨과 아침 7시 50분까지 스타벅스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미팅 당일, 정확히 7시 45분에 스타벅스 앞에 도착했다. 출근 전 카페인을 수혈하고자 들른 직장인, 9시 수업을 기다리는 대학생들로 카페는 매우 붐볐다. 다행히 전화로 미리 예약을 해두어서 기다리지 않고 투고 백 두 상자를 받았다. 직원이 한 상자씩 종이백 두 개에 나눠 담아주었는데도 꽤 무거웠다. 빨대와 종이컵, 종이 홀더와 티슈까지 챙겨 넣고 나니 7시 55분이었다. 제이슨은 아직 오지 않았다.
집이 멀어서 조금 늦나 보다 생각했다. 카페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찬찬히 기다리다 다시 시계를 봤다. 8시 5분이었다. 이제 슬슬 가야 늦지 않게 도착하는데. 마음이 조금씩 조급해졌다. 그냥 먼저 갈까 싶었다. 하지만 짐이 많았다. 혼자서 무리하게 두 박스를 들고 가다가 엎어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참다못해 제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가고 있다고 했다.
'오늘이 얼마나 중요한 날인데 지각을 해? 이런 개나리 같은 놈을 봤나'
식도까지 기어올라온 욕을 겨우 삼키며 "늦었으니까 빨리 오세요"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8시 13분. 이제는 진짜 가야 한다. 더 이상 제이슨을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죄송하지만 스타벅스 직원분께라도 양해를 구하고 택시 승강장까지만 커피 박스를 같이 옮겨달라고 해야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유리로 된 스타벅스 정문 너머로 허겁지겁 뛰어오는 제이슨의 모습이 보였다.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커피 한 박스를 제이슨에게 거칠게 안겨준 뒤 콜을 부른 택시를 향해 뛰었다. 제이슨도 긴급상황을 직감하고 순순히 내 뒤를 따라 재빠르게 움직여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 안에서 대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리님, 지금 커피 받아서 택시 타고 출발합니다"
"지금 탔다고? 늦는 거 아니야? 최대한 빨리 와!"
평소에 화내는 일이 없었던 곰 같은 대리님의 언성은 이미 높아져 있었다. 제가 늦은 게 아니라요, 제이슨이 아침에 20분이나 쳐 늦는 바람에 늦은 거예요 하고 실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제이슨이 충분히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고, 거듭 변명을 한 상황이었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설상가상으로 도로까지 꽉 막혔다. 나는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을 반복했어서 출근시간의 러시아워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출근시간에 용감하게 택시를 잡아탄 내가 너무 한심했다. 하지만 중간에 내릴 수도 없었다. 기사님에게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고 빠른 길로 가달라고 말씀드렸다.
세상에나 1분 1초가 그렇게 빨리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벌써 8시 54분이었다. 다행히 회사 근처 지하철역까지 다다랐다. 그러나 여전히 택시 앞에 늘어선 수많은 차의 행렬들이 보였다. 재빨리 요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때부터 제이슨과 나의 환장할 질주가 시작되었다. 너 나할 것 없이 회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세이렌이 그려진 커피 한 박스씩을 품에 안고서.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들이 이 광경을 봤으면 웃음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검은 정장을 한 남녀가 비장한 표정으로 커피 상자를 마치 수류탄처럼 품고 조심조심 빠르게 뛰어가는 꼴이라니.
뛰다 걷다를 반복하다 보니 드디어 회사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야속하게도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이어들이 회사에 도착해서 화관을 머리에 쓴 채, 한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서 현관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회사 뒷문으로 먼저 들어가는 제이슨의 모습이 보였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욕지기가 솟았다. 뒷문을 코앞에 두고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뒷문으로 들어서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미팅 당일 엘리베이터 사용은 금물이었다.
먼저 올라간 제이슨을 뒤따라 커피 박스를 짊어지고 7층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추운 겨울이었는데도 땀이 날 것 같았다. 전날 미팅 준비로 12시까지 야근을 한 뒤였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맴돌고,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졌다.
드디어 7층이었다. 제이슨은 나보다 한참 빨랐다. 이미 커피 한 박스가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나도 대기 직원에게 나머지 커피 박스를 건네주었다. 9시 6분이었다. 하지만 바이어들은 이미 도착한 뒤였다. 미팅 테이블에 미리 비치되었어야 할 커피가 한 박스 늦게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과장의 표정에서 화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상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제이슨이 7층에 도착해서 커피 한 박스를 테이블에 올려놓자마자 사장, 상무를 비롯한 임원들이 바이어와 함께 미팅실에 등장한 것이다. 나머지 커피 한 박스의 부재에 대한 비난과 질타는 오롯이 내 몫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게 이 모든 상황의 인과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잘못한 사람은 내가 되어버렸다.
미팅이 끝나고 나와 제이슨은 대리에게 1차로, 과장에게 2차로 무참히 깨졌다. 사장님이 얼마나 신경 쓰는 바이어 미팅인데 선임인 내가 좀 더 잘 챙겼어야 한다고 맹비난했다.
나는 제이슨이 사실대로 말해주길 바랐다. 아침에 지각한 것도,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자신이라고, 내 잘못이라고. 동료의 실수를 고자질하는 못난 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로 돌아왔다.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찔끔 눈물이 다 났다. 제이슨이 나에게 사과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과 다를 것 없이 소심한 쭈구리였던 나는 제이슨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이 상황이 그저 잊히기만을 바랐다.
제이슨과 나는 햇병아리 신입사원이었다. 중요한 미팅 당일 늦잠을 자 약속에 늦은 것은 분명 제이슨의 잘못이었지만, 갑자기 벌어진 돌발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던 내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몇몇 죄목들이 떠오르는 지점들도 있다. 지각을 예감했으면서도 아무 대책 없이 오지도 않는 제이슨만 기다린 죄, 출근시간의 교통체증을 예상조차 하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택시를 잡아 탄 죄. 나도 유죄라면 사실 제이슨 만을 탓할 수도 없었던 노릇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저 우리는 신입사원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서투르고 미숙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후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주는 일은 하지 않게 되었다. 비록 선의였으나 잘못을 덮어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고, 그것이 오히려 내게 피해로 돌아올 수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회사에서 잘잘못을 가름하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며, 누가 어디서부터 어떤 잘못을 한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 그것을 바로잡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니라, 전쟁 같은 사회생활에서 적어도 내 자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임을, 이 험난한 질주 끝에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