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아침이 밝아온다. 7시 50분, 알람이 울린다. 그 때 보드랍고 따뜻한 털 뭉치 하나가 침대 가장자리 밑의 이불 속에 소폭 안겨 있다가, 작게 킁 소리를 뱉고는 침대 머리맡으로 쫄래쫄래 걸어온다. 고소한 누룽지 향을 풍기는 두 앞발로 조심조심 균형을 잡고 살포시 내 가슴 위에 착지하는데 성공한다. 올해 7살이 된, 하얀색 털과 촉촉한 코를 가진 강아지 콩순이다.
일상에서 우리(대개는 남편과 나)에게 콩순이를 그냥 지나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침대 옆 나란히 놓인 회색 (강아지용) 계단을 깜찍하게 뛰어올라 침대 위로 올라온 콩순이는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겸허히 수용하겠다는, 다소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러면 우리는 콩순이가 거니는 걸음걸음마다 넘치는 뽀뽀세례와 무한의 쓰다듬, 숨 막히는 포옹을 퍼붓는 것을 시작으로 콩순이와의 밤을 기쁘게 맞이한다.
너나 할 것 없이 카페로 돌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치는 더운 여름, 콩순이를 처음 만났다. 사실 나는 시추 한 마리를 15년간 애지중지 키우다가 강아지별로 보낸 적이 있다. 그 시간 동안 행복했으나, 그렇다고 내내 행복했던 것만은 또 아니어서 걱정이 좀 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우리는 강아지를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책임비’라 이름 붙인 일정 금액을 받고 파양된 강아지들을 분양해준다는 곳을 남편과 함께 찾아갔다. 3층짜리 건물의 2층에 들어서서, 묵직한 문을 힘껏 밀고 들어가니 익숙한 강아지의 냄새, 사람들의 체취, 독한 페브리즈 냄새가 질서 없이 뒤섞인 채 우리를 환영했다.
2층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입구에서 열 걸음 정도 걸어가면 닿을 수 있는 중간에 플라스틱 울타리를 두어 경계를 그어 놓았다. 하얀 울타리를 기준으로 입구 쪽에는 아기 강아지들이 있었다. 레고처럼 쌓여있는 투명한 케이지 안에 아기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한 마리씩 자리 잡고 있었다. 비숑프리제니, 포메라니안이니 하는 품종견들이었다. 직원이 여기 있는 강아지들은 파양견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아기 강아지들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파양견을 원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직원은 다시 울타리 너머로 우리를 안내했다.
우리는 직원을 따라 울타리를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묘한 어둠이 우리를 뒤따랐다. 입구에서부터 환하게 바닥을 비추고 있던 레일조명이 울타리를 경계로 끊겨 있었다. 양쪽에는 각각 두 개의 방이 있었는데, 왼쪽의 방들은 애견용품을 가득 쌓인 창고와 강아지 미용과 목욕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오른쪽 첫 번째 방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먼지와 함께 뒹굴고 있었다. 흘긋흘긋 분주한 눈길로 복도 여기저기를 훑어가다 마침내 오른쪽 벽의 마지막 방에 다다랐다. 직원이 닫힌 문을 열었다. 10마리쯤 되는 강아지들이 한 마리씩 자신에게 허락된 만큼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방에는 10살 정도 된 할아버지 시추, 다리가 곧고 긴 어린 말티푸, 웰시코기를 엇비슷하게 닮은 강아지 등등도 있었다. 남편과 나는 어린 말티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갈색 털의 말티푸는 2살이라고 했다. 낯선 우리를 경계하며 짖지도 않아서 아파트에 사는 우리가 키우기에 적합해보였다.
하지만 당장 강아지를 데려간다고 생각하니 조금 겁이 났고, 남편과 나는 잠시 그곳을 나와 옆 건물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고민을 해보기로 했다. 차가운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강아지를 키우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찬찬히 생각해보자. 우선 매번 똥오줌을 치워줘야 하고, 산책도 매일 시켜야 할 것이고, 혹시라도 아프면 병원비가 만만찮게 들 것이고…….
강아지를 키우면 힘든 점은 이미 다섯 손가락을 한참 넘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강아지와 함께하게 될 행복한 나날들에 대한 기대가, 힘듦을 예고하는 이성의 소리를 입막음해버린 것이다. 반 쯤 남은 아이스 라테를 마저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직원에게 말티푸를 데려가겠노라 말했다. 울타리 밖에 있는 탁자에 앉아서 입양 관련 서류를 작성하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불과 30분 사이에 말티푸를 입양해가겠다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
그때였다. 아까 울타리 너머의 오른쪽 끝방에서 본 하얀 강아지가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가족을 향해 마구 짖고 있었다. 우리 옆 테이블에 앉아 파양견 입양을 고민하던 가족에게, 다른 직원이 그 강아지를 잠시 보여준 것이었다. 8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고, 다급히 아이를 감싸 안은 엄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원은 하얀 강아지를 안고 다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직원을 따라 다시 그 방으로 갔다. 그 하얀 강아지는 역시나 우리가 들어갔을 때도 마구 짖어댔다. 자신의 자리에 돌아가서도, 앙증맞은 앞다리로 펜스에 야무지게 달라붙어 열심히 짖어댔다. 남편과 나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그 강아지와 눈을 맞췄다. 직원은 재빠르게 하얀 강아지를 들어 올려 얼굴을 보여주었다. 그 강아지의 이름은 딸기라고 했다.
우리는 망설였다. 강아지가 너무 짖어 아파트에서 혹시 민원이라도 들어올까 걱정하는 우리에게, 직원이 보여줄게 있다며 다시 밖으로 나가더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자 예상외로 강아지는 짖지 않았다. 직원은 얼굴이 데면데면한 사람들에게만 짖는 강아지라, 정을 붙이고 키우기 시작하면 훨씬 짖음이 덜해질 거라고 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강아지를 조심조심 품에 안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눈이 새까맣고 코가 촉촉한, 하얀 털과 핑크빛 혀가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강아지는 조용히 내 손가락을 핥았다. 나는 강아지를 꼭 껴안았다.
그렇게 콩순이는 우리에게로 왔다.
콩순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더없이 행복하다. 남편과 나, 콩순이는 매일 산책을 한다. 사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산책’이라는 단어는 조금 과분하다. 4.5kg이 채 되지 않는 작은 콩순이에게 부부가 번갈아가며 질질 끌려 다니는 아주 우스운 모양이기 때문이다. 콩순이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내달린다.
산책을 나온 콩순이는 매우 할 일이 많다. 지나가는 강아지에게 시비도 걸고, 1m 간격으로 영역표시도 해야 하고, 뛰어가는 행인을 보면 무조건 따라 달려야 하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다. 특히 평평하게 흙이 덮인 풀밭에 도착한 콩순이는 피겨 선수처럼 제 자리에서 몇 바퀴를 돈 뒤, 슥 자리를 잡고 볼 일(제법 큰 것)을 본다. 남편은 콩순이의 회전력에 매번 감탄하며 그것을 치운다. 사랑스러운 광경이다.
그러나 가끔 쌔근쌔근 잠든 콩순이를 보며 행복해하는 나를 불쑥 가로막고 나타나, 누군가 꾸짖는다. 너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느냐고. 너 또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너와는 다른 외관을 가졌을 뿐인, 동등한 생명으로서 살아 숨 쉬는 강아지들을 마치 물건처럼 품평하고 자신만의 필요에 끼워 맞추려 했던 수많은 사람들과 뭐가 다르냐고. 그리고 이 의문들은 종종 날선 죄책감으로 날카롭게 나를 스친다.
당시 콩순이는 센터에 가장 오래 남아있었던 강아지라고 한다. 자신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좌절을 읽어내고, 마침내는 체념을 배웠을 콩순이의 작은 몸. 그런 콩순이를 차선으로 ‘선택’했던, 또 인간이 한 생명의 생몰을 너무나도 쉽게 ‘결정’하는 뒤틀린 시스템에 동참하는 것에 일말의 의심이나 고민조차 하지 않았던 나의 이기심과 오만함을, 수없이 반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콩순이를 보고, 웃고, 행복을 느낀다. 콩순이가 우리 곁에 머물러주는 시간들은 늘 감사하고 따뜻하다. 짧지만 긴 견생을 버텨왔을 콩순이에게 더 많은 위안과 위로를 줄 수 있었으면, 하고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