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테마 : 세계 가정의 달
초콜릿 도넛 (Any Day Now, 2012)
* 가능한 스포를 피해 작성하고 있으나 민감하신 분은 스크롤을 내리지 말아 주세요.
경계선이 있다. 세계 어디에든. 안과 밖을 나누는 보이지 않는 선이.
가족. 패밀리. 사전적인 의미는 이렇다. ‘부부를 중심으로 혈연인 사람들이 주거를 같이 하는 생활 공동체.’ 이 고전적인 정의는 상당히 고루하다. 이 정의를 뒤집어보면 ‘법적 부부로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꾸린 가족은 가족이 아니며.’ ‘혈연이 아닌 사람들끼리의 공동체는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제아무리 그 공동체 구성원이 진짜 가족보다 끈끈한 정서로 이어져 있더라도 ‘가족’ 이란 이름은 허하지 않겠다는 꼰대의 태도라니. 법과 사회가 인정하는 ‘정상적 범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만 했다. 그건 단순한 이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대가 아플 때 법적 보호자로서 수술 동의서에 사인할 수 있는 실질적인, 생활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영화 [초콜릿 도넛]은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인정받아야만 하는 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은 단순하다. 쇼 댄서인 루디. 루디의 연인인 폴. 그리고 다운증후군 소년 마르코. 시대 배경은 1970년대, 미국. 미국에서 처음 동성결혼 허용 판결이 내려진 것이 2003년, 미국 대법원이 결혼을 남녀 간으로 한정한 결혼 보호법(DOMA)에 부분 위헌 판결을 내린 것이 2013년이었다.
그러니 정부가, 수입이 불안정한 동성애자 독신 남성인 루디에게 마르코의 양육권을 허락할 리가 없다. 루디와 폴이 처음으로 마르코에게 건강 검진을 받게 한 것, 안경을 맞추어 준 것, 교육을 받게 한 것, 숙제를 봐준 것, 마르코가 그들을 원하는 것 따위는 관계없다. 그들은 법적으로 가족이 아니니깐. 그들이 정한 ‘가족’의 선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공동체니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란 이름을 받는 것이 뭐 큰 문제라고, 야단을 떠냐고. 너희가 당당하면 그냥 모여 살면 될 일 아니라고. ‘가족’의 범위 내에 당연하게 들어가 있는 사람들, 그러한 공동체를 당연히 ‘가족’으로 가질 수 있었던 사람들의 오만한 잔소리. 그 공동체는 ‘가족’의 포장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당장 정부가 내 보호 아래 두어야 할, 아이를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할 보호를 원할 뿐이다.
가족의 사전적 정의를 만든 것은 사람이다. 제도를 만든 것도 사람. 그 사람들이, 어린 남자아이가 ‘집’을 찾아 헤매게 하다니 이상한 일이다. 그 아이가 바란 것은 도넛처럼 푹신하고 둥그런, 달콤한 기억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가족. 그 하나였는데.
초콜릿 도넛처럼 모든 것이 둥글게 이어진, 달콤한 세상이 된다면 좋을 텐데. 가끔 세계는 섬뜩하리만큼 정체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