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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y 24. 2016

갈증이 되기 전에

2016.04.09-12 웨이하이 사진여행이야기. 하나.


 전화를 할까, 말까.

 여행 기간은 3박 4일이라 했다. 모집 인원은 약 40여 명. 배다리 식구가 70%. 일반 사진인이 30%.

 딱 두어 줄의 모집 문구가 아무래도 술술 읽어 내려가지지 않았다. 덜컹 이듯 두 단어가 망설임을 불렀다.

 식구.

 사진인.

 식구란 단어는 내겐 그렇다. 두터운 천막 속에 잠들어 있는 것만 같다. 손님이 그 천막을 들추기란 쉽지 않다. 오래전, 사막을 헤매던 여행자들 중에도 분명히 있었을 거다.

기진맥진 지쳤는데도 유목민의 천막을 쉬이 들추지 못했을 사람.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었겠지. 하지만 그 여행자도 목마름에 죽을 듯한 기분이 되면 천막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처음의 덜컹거림을 간신히 목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두 번째 덜컹거림은 좀처럼 흘러내릴 수가 없었다. 40여 명 중 30%면 십여 명 남짓이다. 그 십여 명 중 사진의 시옷자를 간신히 더듬고 있는, 나 같은 초보가 과연 있을까 싶었다.

 사진인이라.

 몇 번을 곱씹어도 부서지지 않았다.

 단어로야 간단하다. 사진을 찍는 사람. 이 정직한 풀이대로 간다면 대한민국의 사진인의 수를 가늠하기는 꽤 쉬워진다. 스마트폰 보급률과 얼추 비슷할 테니깐.

 하지만 단어 그대로만 볼 수 없는 무게가 사람 인(人) 자에는 감돈다. 인(人) 자는 사람들이 나란히 기댄 모양이라 하던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게 문제다.

 어릴 적 인(人) 자를 처음 봤을 때, 나는 그 글자가 애처로웠다. 사람이 두 발로 있는 힘껏 버티고 서 있는 모양새로만 보여서였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인(人)이 가(家)보다도 오히려 무겁다.

 가(家)는 그 분야에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터전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글자다. 하지만 인(人)에는 그런 의지가 없다. 직업이냐, 아니냐, 전문가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 그런 문제를 떠나 있다. 그저 사람으로 사는 내내, 무언가를 놓지 못하고 절절매는 숙명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게 취미라고 말해본 적도 없는 나로서는 그 무게에 끙끙거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번호를 눌렀다. 하나하나.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절실함의 이유는 망설임만큼 분명하지 않다. 왜 이 망설임을 굳이 이겨내야만 하나 싶을 정도다. 절실함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 고개가 기울어졌다. 목마름에 죽기 직전은 분명 아니다. 그렇지만 간질간질, 까끌한 모래가 입 안을 맴돌다 목에 걸려버린 듯 답답하다.

 이대로 두면 곧 갈증이 될 거다.

 갈증의 이유. 그건 물음표 때문이다.

 ‘사진을 찍는다.’

 처음 카메라를 만져봤던 건 열 살 무렵이었다. 아빠의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꽃을 찍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첫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디카를 샀었다. 산티 작요. 애칭 작순이였던 녀석. 사회인이 되고 나서 받은 첫 월급으로 작순이에서 미러리스로 넘어갔다. 올림푸스의 E-PM1. 애칭 피엠이. 뷰파인더도 없고 망원 렌즈를 끼우면 본체가 어디 있나 싶게 작은, 그래서 사랑스러운 녀석이었다. 반쯤은 똑딱이를 닮은 녀석은 오여 년을 내 주머니와 가방 안에서 굴러다녔다. 그렇게 내 첫 여행과 서투름을 모두 받아내고는 망가져 버렸다.



 피엠이가 망가진 후 고민이 되었다.

 새 카메라를 사야 할까. 나는 앞으로도 계속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게 될까.

 주변은 변했다. 이제는 따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스마트폰이 있으니깐.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은 이젠 웬만한 똑딱이를 넘어섰다. 거기에 보정 어플도 훌륭하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만으로 사진전도 열린다. 정정한다. 따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다. 스마트폰이 훌륭한 카메라가 되었다.

 나도 스마트폰이 있다. 그 편리함에도 익숙하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에서 그 편리함은 더욱 빛을 발한다. 모든 사람들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니깐. 내가 사진을 찍는 것에 짜증을 낸 친구도 있었다. 왜 자꾸 멈춰. 그 친구가 유난한 게 아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일행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든 내가 잘못한 게 맞다. 그 뒤로 그 친구와 만날 때에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편리하지만은 않다. 종종 거추장스럽기도 하다. 그런 카메라를 또 사야 할 필요가 있을까. 고민을 뒤로 미루고 피엠이를 보관함에 넣었다. 어쩐지 기분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이틀 후에 피엠이를 가지고 수리점에 갔다.

 “이거, 수리를 해도 정상적으로 못 써요.”

 “그래도 해 주세요.”

 “아끼는 녀석이신가 봐요.”

 “그걸로 사진 많이 찍었거든요.”

 피엠이를 맡기고 집으로 오는 동안 퍼뜩, 내가 했던 말이 머리를 쳤다. 그렇구나. 나는 사진을 찍고 있었구나, 싶었다.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발걸음을 멈추고, 셔터를 누르던 순간.

 ‘찍는다.’는 행위.

 집에 와 이제까지 내가 찍은 사진들을 봤다. 사진들 틈에서 내가 어른거렸다. 잊고 있던 순간의 감정들도 조각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저장된 수천 장의 사진들 중, 고작 서너 장만이 그랬다.

 나는 사진을 찍었던 것일까?


 

 피엠이를 수리점에서 찾아오던 날, 새 카메라를 샀다. 피엠이를 수리한 건 녀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찍는 것을 찍는다고 생각도 못했던 내 손에서, 망가질 때까지 함께 했던 녀석이었다. 적어도 언제든 전원은 켜지는 상태로 두고 싶었다. 죽은 것이 아닌, 잠자듯 보관함 속에 놓여 있을 수 있도록 말이다.

 아무래도 이 물음표는 쉽게 사라지지 않겠구나.

 나도 안다. 천막을 들춰도 늘 물을 얻을 수는 없다. 그 안의 사람들이 헤매던 여행자를 아무리 반갑게 맞아들인데도 그렇다. 배 터지게 물을 얻어 마시고도, 오히려 더 심한 갈증을 느낄 수가 있다. 물을 자신의 몸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몫이다.

 그래도, 그렇다면.

 갈증이 되기 전에 살며시, 누군가의 손님이 되는 것도 방법이다.

 모니터의 글자 하나를 살며시 가렸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조금은 무게가 덜어질 수 있도록 사진인은 사진이 되었다.

 신호음이 갔다.(*)








유진 [타랑]

Blog : http://blog.naver.com/hik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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