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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Aug 03. 2016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을까

영화  <부산행> 을 보고, 수다떨기




※ 개인적인 감상이 주입니다만, 내용 중 미리니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16년 여름, 부산으로 향하는 열차가 스크린을 덥쳤다. 7월말 이미 관객수 800만을 돌파했으니 천만도 무난히 가리라는 예상이다.

이러한 흥행이 일어나기 전부터 '부산행'은 일부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기대 겸 걱정작으로 이미 입소문이 오르내리던 작품이었다. 이른바 좀비 마니아들이다. 

내 주변에서도 꽤 있었다. 어쨌든 좀비가 나오니, 한국 영화에서 좀비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궁금하니 한번쯤은 보겠다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 서브컬쳐 마니아들의 대단한 점은 기대가 되든 걱정이 되든 일단 본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장르에 대한 애정이다. 

이러한 애정이 넘치는 친구 덕에, 나도 의도치 않게 꽤 많은 좀비물을 봤다. 좀비나 고어, 범죄물. 이른바 피터지는 장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말하면서도 봤다. 사람이란 주변의 영향을 받는 법이라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케이스, 그게 나다. 

그래서 '부산행'도 봤다.

그리하여 몇가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을 집어내어 깨작깨작 적어보면 이렇다.



첫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둥둥 떠올랐던 생각.

'부산행'은 좀비 영화가 아니라는 것.

좀비는 나온다. 하지만 좀비가 주가 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부산행'에서 좀비는 어디까지나 소모품이다. 한 개인이 좀비가 되기 전과 된 후의 간극이 주는 비극은 이 영화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 

영화의 핵심을 이루는 등장인물들은 하나둘씩 좀비가 되어가지만, 이들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좀비가 되기 전의 상황에 머문다. 

상화(마동석)을 보라. 그는 좀비가 된 후 한번도 출연하지 않는다. 실상 그렇게나 파워를 자랑하던 상화(마동석)이다. 좀비가 된 후에도 파워 오브 킹 좀비가 되지 않았을까.

사람을 덥치기 위해서라면 열차 문 하나 정도는 너끈히 부수었을 것 같다. 그러다가 자신의 아내, 성경(정유미)과 마주쳤을 수도 있으리라. 

좀비가 되기 전 성경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던 상화가, 좀비가 된 후 성경과 마주쳐서 이성을 잃고 덤벼들 때의 그 간극. 그 시점에서 성경이 아닌, 상화의 표정과 울부짖음에 포커스가 가는 것이 좀비물이 아닐까. 

이상 어설픈 좀비영화 론이었다. 좀비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야 다 다를테지만, 내 분류 기준은 이렇다는 거다. 

실제로 주변에서 '부산행'을 보고 좀비가 기억에 남았다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다. '부산행'에서만 보여지는 좀비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법칙도 없었으니깐. 곧 개봉한다는 영화 '서울역'에서는 왜 좀비 사태가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 해도 거기서도 좀비는 소모품일것 같은 예감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그냥, 이 시리즈는 좀비물은 아니라는 걸 미리 깔고 보는 게 좋을 듯 하다. 

한마디로 좀비를 기대하고 보면 안된다는 거다.



두번째는 다른 사람 리뷰를 보고 둥둥 떠올랐던 생각. 

'부산행'에 대해 미묘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수식어가 몇 보였다. 

'한국형' 가족영화라는 것.

'부산행'이 가족영화라는 점에는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가족영화, 그것도 부성애를 내세우는 가족영화의 기본 포맷이 다 보이니깐. 

부성애 강조 포맷은 대충 이렇다. 

바쁜 일 때문에 가정에 신경쓸 수 없는 아버지 + 그에 따른 가정불화 + 표현은 못하나 숨겨진 부성 + 재난 후 아이를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

'부산행'의 석우(공유)와 딸 수안은 이 포맷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껄렁하나 숨은 정 많은 상화(마동석)에 임신한 아내(성경) 조합도 그렇다. 상화가 마지막에 외치는 말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이름이다. 

하지만 '한국형' 이라는 점에서는 고개가 좀 갸웃해진다.

저러한 부성애 강조 포맷이 어째서 한국형인가, 하는 점 때문이다.저 포맷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으니 말이다.

당장 저 포맷에 제일 들어맞는 영화를 하나 꼽으라면 2005년에 개봉했던 '우주전쟁'이 떠오른다. 

나는 다코다 패닝의 귀여움 하나만을 믿고 이 영화를 보러 갔었다. 그리고 하나의 의문을 품고 영화관을 나왔었다. 대체 왜, 저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주인공인 톰 크루즈는 안죽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부산행'은 그나마 주인공 일행이 살아남는 정당성이라도 부여되지, '우주전쟁'에는 그 정당성도 없다. 톰 크루즈 옆에 상화(마동석)같은 파워 캐릭터라도 하나 붙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톰 크루즈는 그냥 뛰기만 하는데도 잘 살아남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은 다 우주생물체에 빨려들어가 분쇄되어 죽는 순간에도 다코다 패닝은 살아남는다. 주인공이니깐. 주인공의 딸이니깐. 

마지막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는 점이 더해져, 이 영화는 정말로 부성애 플롯의 궁극점으로 내 기억에 남았다. 

고로 재난영화와 가족영화를 결합시키는 것도, 거기에 부성애 플롯이 끼어드는 것도 결코 한국영화만의 특징이 아니라는 거다. 

생각하기에, 이 세가지 조합은 제아무리 클리셰라 욕을 듣는데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다. 클리셰가 왜 클리셰인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기에, 흔한 '장르'로 자리잡아 클리셰가 된 거다. 당장 나만 해도 모성과 부성을 내세운 영화를 보면 욕하면서도, 보는 중에는 한번쯤 찔끔 눈물을 흘린다. 

부성과 모성에 대한 사람들의 공감은 경험에서만 나오는게 아니다. 사회적인 학습에 의해서도 이루어진다. 한번도 어머니와 깊은 유대관계를 가져본 적 없는 사람이 모성에 대해 가지는 환상, 아버지과 서먹한 관계라도 부성애 넘치는 영화를 보고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학습은 딱히 한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농경사회 이후 생활방식을 가진 민족이라면 어디서든 존재할 터다.

'부산행'은 부성애 플롯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의 '한국형' 영화이긴 하다. 다른 가족의 아이까지 챙기는, 이른바 오지랖 넘치는 정을 그 위기일발의 상황에서도 발휘한다는 부분이 그렇다. 긍정적인 한국형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외계인이 침공하든, 좀비가 달려들듯, 다른 사람의 아이까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들고 뛰는 장면은 동양쪽 영화(특히나 일본, 한국)에서 더 잘 보이긴 하는 듯 하다. 



세번째로 영화를 보고 나서 퍼뜩 머리에 떠올랐던, 그리고 가장 오래 남았던 생각.

이기적인 아저씨, 용석(김의성). 누가 그를 욕할 수 있을까.

'부산행'에서 기억에 남는 준악당을 한 명 말해보세요, 하면 누구나 입을 모아 말할 터다. 이기적인 아저씨, 라고. 극중에서 정확한 이름이 나오는 때가 거의 없어서 그렇게 호칭될 수 밖에 없는 등장인물이 바로 용석이다. 용석은 이른바 밉상 행동들을 서슴치 않는다.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 문제 해결하기, 사람들을 선동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다른 사람을 희생물로 삼기 등등이다. 이러한 용석의 행동은 상화(마동석)의 정의감 넘치는 태도에 대조되어 더욱 비겁하게 비추어진다. 

기장(정석용)을 뛰어넘어 기차에 뛰어드는 부분에서, 용석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된다. 상대가 기장님이기 때문이다. 

이 기장이 어떠한 사람인가. 그 극한 상황에서도 승객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버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열차를 찾기 위해 선로를 뛰어다니고, 그 와중에 용석이 달려오자 도와주러 달려가는 사람이다. 상화(마동석)처럼 눈에 띄는 액션이 적을 뿐이지, 정의감 면에서는 단연 영화내 톱클라스다. 

사실 기장은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면 가장 끝까지, 아무 문제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운전석에서 문 잠그고 안나오면 된다. 승객이야 어찌되었든, 자기만 살겠다고 혼자 열차 몰고 부산까지 간데도 그를 탓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기장을 발판으로 삼다니. 이 빌어먹을 놈. 진희(소희)때까지는 꾹꾹 눌러놓았던 용석에 대한 분노가 터져나오는 순간이다.

이러한 분노 유발 행동에, 문제 확산 행동(문을 걸어잠그고 열어주지 않은 것), 거기에 죽음의 순간 슬쩍 내보이는 나도 그저 무서웠을 뿐이라오 삼박자까지. 용석은 어떻게 봐도 준악당이다. 약간의 연민은 들지만 아무리 해도 좋아할 수는 없는 캐릭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 중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과연 누구처럼 행동할 것인가.

제아무리 있는 힘껏 자신을 미화한다 해도 마동석에게 감회받기 전의 우석(공유) 정도일거다. 자신과 직접적인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의 안위만을 신경쓰며 도망치기에 급급할터다. 미화를 아예 걷어내고 날것 그대로를 드러내라 하면 자기 한 몸만 열심히 도망칠 사람도 많을 터다. 진희(소희)처럼 자신의 친구를 따라 안전한 곳에서 불안전한 곳으로 이동하는 것만 해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건, 인정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왜 이럴때 비빌 언덕 하나 없는가를 한탄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른바 사람들을 선동할 재주와 통용되는 권력이 있다면.

영화관 밖, 제 3자의 눈으로 보기에 용석의 지위 의존적 행동은 우스운 것이 된다. 재난 상황, 그것도 바깥 사회까지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 권력자의 이름을 댄다. 자기 자신의 온전한 능력이 아닌, 어떤 회사의 누구라는 지위를 내세워 행동한다.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고는 생존하지 못한다. 그 복합적인 상황은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관찰자의 입장으로 보기에 보이는 것이다.

만약,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용석이 가진 '얄미운'것들을 부러워하게 될 지 모른다. 혹은 용석에게 선동당해, 나 역시 주인공 일행에게 나가라 소리지를 수도 있다. 문을 열어버린 할머니의 마음이 90%정도는 이해되는 걸 보면, 내가 대량 학살에 한몫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나 역시 정의는 아닐 것이다.

영화에서의 준악당 용석. 그는 어디까지나 지극히 '일반적인' 사람이었다.

곰곰히 생각해본다.

과연 누가 그를 자신있게, 욕할 수 있을까.

죄없는 자만이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던 순간 멈추었던 돌팔매질은 차라리 양심적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죄가 있음은 인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니깐. 그러나 영화란, 가상의 이야기란 그 죄조차 없는 듯 느끼게 만들어준다. 사람들은 주인공에 공감하지, 보스급도 아닌 고작 준악당에 공감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터다.

그렇기지만 나는 더 이상 그, 용석을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







유진 [포송]

Blog : http://blog.naver.com/hik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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