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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쥬 Oct 14. 2024

시댁 이야기

이런 시댁도 있습니다.

시댁, 시어머니 하면 자극적인 이야기가 넘쳐난다. 여자들끼리는 뭔가 유대감이 생기는 것이 사실인데 왜 시어머니와 며느리 하면 유독 무서운(?) 이야기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결혼을 하지 않은 친구들이 어떤 시댁을 만날지 두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는 걸 보며 우리 시댁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처음 시댁 식구들을 만난 것은 시누이였다. 결혼 전 처음으로 시댁에 방문하기 얼마 전에 시누이가 잠깐 따로 보자고 했다. 당시 시조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외출이 어려워 나와 남편이 집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처음 만나는 시댁 식구에 조금 긴장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근처 백화점에서 케이크를 샀고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집에 방문했던 기억이 난다. 1시간 정도 집에 머물렀던 것 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는 말은 그 한 마디였다. "처음 인사 오면 불편할 텐데 미리 나랑이라도 안면을 터 놓으면 우쥬가 그날 조금은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해서 보자고 했어요" 이미 그날 나는 알았다. 참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시댁에 방문하며 고기랑 과일을 사갔던 것 같다. 별다른 에피소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중에 오빠에게 어땠냐고 물으니 어머님께서 "앞으로 엄마가 우쥬를 좀 많이 챙겨줘야 할 것 같아. 내가 보듬어주고 싶어"라고 하셨다 한다. 나는 그렇게 그날 어머님의 딸이 되었다.


실제로 결혼 후에도 어머님 댁에서 식사를 하거나 할 때, 설거지를 해본 기억이 없다. 늘 너는 거실에 가있으라며 등을 떠미셨다. 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면 시누이가 나를 데리고 거실에 갔다. 설거지는 어머님 혹은 남편 등 돌아가면서 했다. 다들 시댁에 가는 것이 싫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시댁이 부담 없고 좋았다. 비단 '설거지를 안 해서'가 아니라 나도 식구가 된 기분이 들어서. 가끔 내가 설거지를 하거나 일을 하면 어머님은 굉장히 미안해하셨는데 나는 "어차피 저도 맛있게 먹은 건데 설거지하는 게 뭐 대수인가요" 했다.


어머님 본인은 한평생 시댁 제사로 힘들어하셨다. 남편에게 듣기로는 제사 문제로 시아버님과 평생을 싸우셨다고 했다. 집안의 큰 아들 역할을 하셔야 하는 아버님과 그게 너무나도 힘든 어머님. 두 분의 주요 갈등은 늘 제사 문제였다고 했다. 어머님은 내가 그 집에서 일하는 걸 상상만 하셔도 분통이 터지신다고 했다. 어머님은 본인의 시댁에 선포하셨다. 이제 더 이상 제사를 지내지 않겠노라고. 그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들었다. 특히 형제분들이 많이 반발하셨다고 했다. 결국은 어머님이 이기셔서 제사는 지내지 않기로 했고, 나는 이러한 전말을 나중에 남편이 이야기해 주어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고 원래 제사가 없는 집이구나 했다.  


결혼식 당일 폐백을 드리려고 준비하는 와중에 밖에서 싸움이 났다고 한다. 이 역시도 나는 몰랐다. 안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고 밖과는 거리가 있어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싸움의 발단은 어머님의 시댁, 그러니까 아버님 형제분들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단체 사진 찍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서 폐백이 좀 늦어졌는데 그걸로 큰 소리를 내고 불만을 표시했다고 한다. 시누이가 결혼식 당일 날 큰 소리를 내셔야겠냐고 말렸고, 남편도 욱해서 뛰쳐나가려고 했다는데 도와주시는 이모님이 신랑님은 참으셔야 된다고 말렸다고 한다. 남편 말로는 폐백이 늦어진 건 핑계고 결국 제사를 없애려고 했던 어머님에 대한 불만 표출이었을 거라고 했다. 어머님은 결혼식장에서 큰 소란이 있었던 걸 부끄러워하셨고, 사돈댁(나의 친정 부모님)이 몰랐으면 하셨다. 그리고 아마도 모르실 거라고 여기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 우리 엄마 친구분과 내 가방을 들어주던 친구가 있었다. 우리 엄마는 친구 분께 이야기를 듣고 나중에 신혼여행 다녀와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내가 나중에 가방을 맡아주던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는 그제야 말해주었다. 내가 신경 쓸까 봐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본인도 그 상황을 다 보았다고 했다. 결혼식 당일에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한 신부였다.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도 시어머님이 도와주셨다. 매일 오셨던 것은 아니고 2-3일에 한 번씩 오셔서 아기를 봐주셨다. 밤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어머님은 진짜 딸처럼 나를 돌봐주셨다. 늘 오실 때 반찬이며 뭐며 한가득 가져오셔서 점심식사를 차려주셨다. 나는 너무 맛있어서 어머님 오시기만을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다 먹고 설거지라도 할라치면 원래 이런 건 엄마가 하는 거라면서 앉아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설거지를 다 마치고 나면 아이를 봐줄 테니 들어가서 눈 좀 붙이라고 하셨다. 나는 '괜찮아요..'라고 했지만 푹 자는 것이 소원일 때라 못 이기는 척 들어가서 1-2시간 달콤하게 자다가 나오곤 했다.


어머님은 아이가 채 돌이 되기도 전에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몇 달 전부터 아프셨는데 친구분들을 간혹 만나면 내 이야기를 그렇게 하셨다고 했다. 우리 며느리 아기 키우느라 힘들어서 내가 반찬 해다 줘야 하는데 아파서 못해준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나중에 어머님 장례식장에서 들었다. 조문을 오시는 어머님 친구분들 마다 나를 보고는 한 마디씩 하셨다. "네가 며느리구나? 너희 어머니가 너 걱정을 그렇게 했어.. 우리 며느리 반찬해다 줘야 하는데 내가 아파서 못해준다고.." 본인 아픈 것이 우선이셔야 할 텐데 내가 뭐라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렇게 내 걱정만 하셨다.


나는 어머님 돌아가시고 우리 어머님 불쌍해서 어쩌나라는 생각만 했다. 한평생 자식들, 며느리, 사위 생각만 하다가 가셨다. 시누이는 말했다. 우쥬가 우리 엄마 둘째 딸이었다고. 나는 그걸 너무 뒤늦게 알았다. 아쉬움만 남는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나는 시댁과 가까이 지낸다. 집이 가까울 뿐더러 아버님께서 우리 아이를 돌봐주시는 덕분에 나도 일을 하고 있다. 아버님이 아이 등하원을 도와주시기때문에 아침은 우리 집에서 드시는데, 내가 부담스러워할 것을 늘 우려하신다. 시누이와도 매우 돈독하여 우리는 가끔 맥주를 마시러 가거나 같이 헬스장에 운동을 가기도 한다. 주말에 가끔 만나 식사를 하기도 하고 가을에는 캠핑도 가기로 하였다. 며느리를 "가족"으로 받아들여준다면 고부 갈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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