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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ESTA May 23. 2021

살아 숨 쉬는 죄

재앙의 시작




초등학생 즈음 이었을까? 엄마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엄마 아빠는 너를 가져서 결혼했어, 그래서 너도 엄마 아빠 결혼식에 참석했지'

그랬구나. 흔히 요즘들 말하는 속도위반, 혼수 뭐 그런 격이었겠거니 하면서. 왜냐하면 사촌 중이나 친구들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철없을 적 출생의 비밀을 신나게 공유하곤 했더랬다.




별로 개의치 않던 생각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건 엄마 아빠의 사이가 안 좋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빠는 늘 가족 외의 사람들에게는 세상 좋은 그런 사람이었다. 자신의 형제들과 할머니에게는 언제나 믿음직하고 건실한 본보기가 되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주폭을 하거나 무척 억압적이고 독단적이어서 여러모로 가족 모두를 괴롭게 했다. 그래 이것도 사랑의 한 종류겠지. 아빠가 사랑하니까 우리에게 주는 관심이겠지. 





항상 집안일을 하던 엄마는 이따금 술을 먹고 들어오거나 슬픈 노래를 부르고 단정한 옷 대신 야상이나 군화를 신고, 마치 퇴역한 군인이 불명예제대라도 한 듯 슬피 울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는 항상 무미건조한 이야기를 했다. 서로 몇 시에 들어왔는지. 저녁으로는 뭘 먹었는지. 그리곤 금세 대화가 끊어졌고 집안의 분위기는 한계점에 도달해 이제 곧 터질 날아간 풍선같이 아슬아슬했다. 하지만 암묵적으로 그랬을 뿐 표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어렸지만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무언가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금.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뚜렷해지고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금. 그리곤 결국 깨지고 마는. 그런 식의 진행이었다. 아마 이 글을 읽으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에 엄마와 아빠는 별거를 시작했다. 엄마가 집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한 것이다. 나름 스무 살이면 성인이라지만 올 것이 왔구나 생각하니 덜컥 여러 가지로 겁부터 났다. 매일 엄마와 연락 여부를 묻기 시작하는 아빠. 고스란히 돌아오는 아빠의 스트레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한 것이 아닌 완벽해야 했다. 6남매의 장남으로서, 할머니의 믿음직운런 큰아들로서, 회사에서는 고속 승진하는 멋진 팀장으로서. 확실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빠가 엄마는 찾는 이유가 사랑해서는 절대 아니었다는 것.



엄마는 아빠가 없는 시간에 때때로 집으로 와서 우리를 보기도 했다. 그때는 엄마도 많이 원망스러웠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덜컥 애를 가지고 사랑하지 않게 된 사람과 20년을 살았으니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되찾고 싶었으리라. 그래도 때때로 엄마는 밉고 명절에 처음으로 가지 않은 엄마의 빈자리를 어떻게 메꾸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아빠는 골머리를 썩었고 말했다시피 그 스트레스가 항상 우리에게 돌아왔다. 



엄마가 없이 처음 할머니 댁에 갔던 날 모두 의아해했다. 그렇게 가족들에게 잘하고 희생하던 엄마가 안 보인 것이 어색했을 터. 엄마는 그랬다. 고모들이 늦게 시가에서 도착해도 자다가 일어나 밥을 차리거나 할머니 할아버지 병수발은 엄마가 다 하기도 했다. 그런 엄마가 명절이라는 큰 행사에 보이지 않자 친가 친척들은 아빠 모르게 엄마의 행방을 묻곤 했는데 눈치가 빨랐던 나는 엄마가 개인적인 작업을 시작해서 못 오게 된 것이라 둘러댔다. 한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당연히 그 거짓말은 오래가지 않았고 친가 친척들 역시 암묵적으로 알게 되어 더는 나를 곤란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괴로웠다. 괴롭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엄마 아빠는 너를 가져서 결혼했어'라는 말이 삐뚤어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엄마가 괴로운 삶을 살았고, 아빠가 현재 괴롭고, 그 덕에 우리에게 고스란히 오는 괴로움과 고통. 나는 하필 우리 가족이 이렇게 되어간다는게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그럭저럭 안으로 잘 쌓았지만, 청소년이던 동생은 온전히 쌓지도 승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담배를 손에 대기 시작했다. (그 사실도 굉장히 괴로웠다.)



모두가 괴로운 시점. 만약 내가 그때 생기지 않았더라면.

엄마랑 아빠가 결혼했을까?

동생이 연이어 태어났을까?

엄마가 지금처럼 술을 먹고 우는 날이 있었을까?

아빠가 야누스의 두 얼굴처럼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결국 나는 재앙의 씨앗이었다.

살면 안 되는 존재라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고 싶지 않지만, 모두의 원망을 그러모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바보같이. 
내가 선택한 일도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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