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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Oct 14. 2023

박완서-한 말씀만 하소서

고통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

신을 잘 믿으면 고통 없이 행복하게만 살게 될까? 질문을 바꿔서,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은 언제나 지상낙원이어야 하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상실)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는 극복된다기보다는 그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작가 박완서(1931~2011)가 1988년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난 이후에 겪은 일들과 심경에 대해서 가톨릭 잡지 <생활성서>에 1990년 9월부터 1년간 연재했던 글을 묶은 책이다.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그동안 스스로에게 질문해 왔던 '신의 존재와 인간의 고통',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종종 발생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조리한 죽음에 대해서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라 할 수 있는 박완서는 어떻게 반응했는지가 궁금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완서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그녀 역시 아들의 죽음을 부정하고 신에게 분노하는 과정을 겪으며 작가의 표현대로 참척(자식이 부모나 먼저 죽는 일, 한자로는 慘慽으로 쓰는데 참혹할 참, 근심할 척을 쓴다)의 고통으로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적응 아닌 적응을 해나간다는 것이다. 박완서는 책에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지나치게 솔직하리만치 표현하고 있는데 한편으론 죽음학에서 말하고 있는 여러 메시지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많아서 놀랐다. 



아래 책 내용의 일부를 인용해 본다.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 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 내가 죽고 싶다는 건 얼마나 새빨간 거짓말인가"

"... 세월이 약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처럼 격렬한 반감이 솟구칠 때도 없다"

".. 세상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좋은 것으로 충만해 있어도 내 아들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처럼"

"부모는 어리석게도 자식이 성취한 것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 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을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나는 그때 아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 품 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알아버렸다가 아니라 알아야 할 무진장한 걸 가진 대상으로 우뚝 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던지..."


"가시 박힌 손가락은 건드리지 않는 게 수잖니?... 못 박힌 가슴도 마찬가지란다. 오오, 제발 무관심해다오.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역시 당신은 안 계셨군요. 그를 부정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앙갚음의 한 방법이었다"

"...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 법구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이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닫는다. 혀가 국맛을 알듯이"


"세상엔 남의 불행이 위안이 되는 고통이 얼마든지 있다... 남의 고통에 쓸 약으로서의 내 고통, 생각만 해도 끔찍한 치욕이었다"

"외아들을 잃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때, 만일 딸들 중의 하나를 잃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려고 했었다"

"다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내가 아들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소서"


박완서도 이미 고인이 되었기에 하늘나라에서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을 만났으리라.

고통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은 함부로 공감하거나 위로할 수 없는 일이다. 지켜봐 주고 곁에 있어주고 생활에 필요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나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성경의 욥의 고통이 있고 신도 고통을 당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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