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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택 Spirit Care Jun 30. 2024

詩 "오래된 기도"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는 성경 구절이 있다. 시인의 말대로라면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리 거창하지 않고 격식을 차릴 필요도 없이 그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노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음식을 오래 씹으며 음미하기만 해도,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그냥 걷기만 해도, 바다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그리고 죽음이 내 삶에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해도...,


특히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라는 시인의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죽음학을 공부하고 강의하며 메멘토모리(Memento mori :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를 강조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리고, 숨쉬기와 명상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입장에서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도 새롭게 와닿는다. 


시의 제목을 '오래된 기도'라고 한 시인의 의중은 알 수 없으나 기도라는 것이 꼭 신을 대상으로만 한다거나 무엇을 바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일상을 자각하는 모든 순간이 기도이며 그런 기도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음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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