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신용카드(교통카드 용도)가 아닌, 비슷하게 생긴 체크카드(교통카드 기능이 없는)라는 걸 알았다. 내 손에는 천 원과 오천 원권이 한 장씩 있었다. 천원은 차비로 내기엔 부족한 금액이고 오천 원은 거스름돈이 어떤지 몰라 곤란해하는 나를 보고 “그냥 천 원만 넣으세요” 너무 흔쾌히 말해주는 기사 아저씨가 얼마나 감사하던지. 솔직히 이미 출발해 버린 버스라서 다음 정류장에 내려야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집을 나설 때 피곤하고 귀찮던 마음이 기사님의 한 마디에 오늘 하루가 다 좋을 것 같은 기분 좋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오천 원을 이용해서 연이어 지하철을 이용했다. 70대, 그 이상도 되어 보이는 백발의 어르신이 지하철에 오른다. 좌석의 끝자리에 앉아 있는 내 옆 기둥을 잡고 서 있는데, 물론 짧은 순간에 고민을 하긴 했다. 요즘은 자리를 양보받는 어른 중에 굳이 양보를 바라지 않은 분들도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호칭도 싫고 자리 양보를 바라는 노인처럼 여겨지는 것도 달갑지 않다는 것이다. 양복 한 벌과 깨끗한 구두를 갖추고 멋스러운 지팡이를 들고 짚고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에 왠지 권하기 조심스럽긴 했지만, 앉아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으니 “어르신 여기 앉으세요”라며 일어났다. 역시나 “됐어요. 됐어요” 거절은 하셨다. 그런데 그 말투가 당신의 마음을 고맙지만 괜찮다가 아닌, 불쾌한 듯한 목소리 톤에 좀 민망하고 당황스러웠다. 조금만 가면 내릴 거니 앉아있으라는 친절한 설명도 없이, ‘괜찮아요’가 아닌 ‘ 됐어요’란 말에 내가 실수했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듣고는 이미 일어난 자리에 다시 앉기도 어색해서, 나는 입구 쪽으로 비켜섰고 결국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도 굳이 필요하지도, 또 어쩌면 앉고 일어서기가 (무릎이나 허리의 문제로) 더 불편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지만, 굳이 상대방의 호의를 저런 식으로 거절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앞 전의 버스의 경우와는 달리, 당황스럽고 그 상황이 민망했다.
친절이나 호의가 무조건 좋다는 것은 아니다. ‘베풀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에 조심스러워한다. 도와준다는 느낌보다는 주고-받는 사람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같은 어감에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듣기 싫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상대방이 요구하지도 않은 호의를 보이는 것을 오지랖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의나 친절은 ‘좋은 마음’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 결과가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나쁜 결과나 예기치 못한 낭패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처음의 (좋은) 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처음의 그 마음은 알아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세상의 대부분이 작은 좋은 마음 하나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에 의미를 많이 두는 편이다. 인권문제나 환경운동, 많은 정책들과 교육현장 등 세상을 좀 더 살기 좋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사람을 위하는 좋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이해한다면 상대방의 실수에 대해서도 조금은 너그러울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의 민망함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그 어른의 성향일 수도 내 생각이나 태도가 너무 옛날 식일 수도 있다. 세상은 복잡해졌고, 많은 가치 기준들이 변했으며, 다양성을 존중받는 사회가 되었다. 누구의 생각이 옳은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