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을 “팔자가 편해서”, “걱정할 것이 없어서”라고 마음의 선을 쫙 그었었다. 내 상황이 되면 그럴 수 있나 보자, 나처럼 힘들어 봐라, 이런 사람하고 살아봐라.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라는 노랫말처럼 나는 생각을 더하기만 했다. 생각이 많은 것을 그렇게 힘들어하고 싫어하면서 그 생각을 보태는 사람 역시 나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왜 나는 생각을 멈추거나 빼지 못할까. 생각을 자제하고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구들을 찾아 읽고 메모를 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멈춰지지가 않았다.
이전에 나는 에세이와 심리학 분야는 잘 읽지 사람이었다. 에세이는 소설이나 전문 서적에 비해 필자(소설 속 창조된 주인공과는 다른)의 감정이 많이 들어간 탓에 감정의 동요가 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와 상황이 다른 경우에는 이질적이라 느껴 공감이 안 된다. 나랑 비슷한 상황을 글에서는, 그들은 결국 털고 일어나고 과정을 닮고 있으니 현재의 나와는 또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난 온 시간과 감정보다는 지금의 모습이 부럽기만 하니, 완전한 위로를 받지는 못한다. 심리학 서적 역시 머리와 마음의 이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글을 이해한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상대를 인정하기는커녕 탓을 하게 된다. 나만 이렇게 까지 책을 읽으면서 마음 수양을 하고, 이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그렇게 억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책 하나를 읽는데도 생각이 많고 사설이 길다. 언제부턴가, 직면한 내 모습이다. 상황이 어려워졌을 때 나오는 모습이 참이라고 하니, 인정하자. 인정하기 싫어 몸부림을 치다 보니,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느라 말과 생각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시작한 글쓰기가 마음을 더 휘젓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고 있었다.
생각이라는 것은 물이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다. 양을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할지 말지처럼 셔터를 올릴지 내릴지를 결정해야 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셔터를 완전히 내리고 그저 틈새로 흘러 들어오는 물을 막고, 닦아 가면서, 대비하고 적응하면 된다. 하지만 셔터를 올렸을 때 들이닥치는 물의 양을 가늠할 수 없다. 온몸이 젖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세찬 물살에 비틀거릴지도 쓸려서 넘어질지도 모른다. 다행히 높은 곳에 올라가 잠시 피한다 하더라도 올라오는 수위를 가만히 서서 버텨내기는 쉽지 않다.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거센 물살은 그 후의 내 젖은 옷차림을 해결해 줄 수 없다. 햇볕에 나가 옷을 말릴지, 새 옷을 꺼내 입을지는 내가 결정을 해야 한다. 젖은 채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다. 잠시 그들의 (나와는 다르게 사고하는) 옷을 빌려 입는 것도 방법이다. 또 찰떡같이 잘 어울릴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