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더위가 무색할 정도로 시원한 바람이 좋아서 어둑해진 거리를 한참을 걸었다.
익숙하게 통화 버튼을 누르고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기가 싫어서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섰다.
나는 관계에 영향을 주는 말과 태도에 지나치게 의미부여를 많이 하는 사람이다. 문을 열고 닫는 태도, 사용하는 단어와 표정 하나에서도 ‘존중의 의미’를 부여하는 속칭 꼰대 스타일이다. 꼰대라 칭하기엔 다소 억울한 면이 있지만, 아니라 할 수도 없으니 우선은 그러기로 하자. 물론 나에게만 해당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중요한 가치관이라는 의미다.
요즘 나는 ‘존중’이 얼마나 포괄적인 의미인지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각종 좋은 의미를 다 가져와 생각하고 실천을 하려고 해도 같은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함께”라는 단어가 개입되는 순간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유난히 반찬이 맛있게 된 날, 나는 신이 나서 “이거 한 번 먹어봐. 오늘 정말 성공적이야”라고 말한다. 남편은 “내가 알아서 할게. 먹은 사람이 맛있다 해야 잘된 거지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데 의미가 있나. 그것도 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거야” 한다. 이런 일이 반복이 되면,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줄어든다. 아이 역시 엄마는 그런 면이 있다며 상대를 부담스럽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어딘가에서 내가 틀렸을 수도, 사람에 따라 거짓말로라도 그렇다 해줘야 하나 싶은 부담감이 들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러면 좀 어때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그저 상대를 위한 기분 좋은 한 마디를 기대하는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물론 나도 그들의 성향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에서 굳이 성향을 그렇게 강하게 드러낼 일인가 말이다.
나는 칭찬과 예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아이에게 “그렇다”라고 대답해 준다. 동의를 구하는 남편에게 마음 편하라고 일부러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그건 너의 스타일이라며 일축해 버리면 나 역시 그럴듯하게 반박할 능력은 없지만, 내가 잘못된 것인가 하는 자문은 매 순간 하게 된다.
그들이 말하는 나쁘지 않은 개인주의는 때때로 내게는 이기주의로 느껴진다. 나는 이 문제를 아직도 풀지 못했다. 왜 본인들의 성향(본성)은 그렇게 당당하면서 관계성을 중시하는 나의 성향은 존중받지 못하는지. 아니다. 존중은 하지만, 억지로 맞춰줄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는 말일까. 인정을 해 줄 테니, 그 이상은 바라지 말라는 말인가. 해결 못한 나 혼자만의 문제다. 여전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늘 외로웠다.
걸으면서 생각했다. 오늘 나로서는 이해 안 되는 남편의 성향에 대해 나열했다. 얼마나 이상한 사람인지를 알리고 내가 그래서 힘들었음을 말하고 싶었을 거다. 결국 또 험담이겠지. 그런데 아이의 말처럼 “저런 사람도 있지”로 바꿔봤다. 남편 역시 그렇게 말했으니 내가 그 부분이 안 되는 사람이라 인정도 해봤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행동과 태도, 말투와 표정이 싫었을까. 아마 나는 그 모든 것에서 “나를 아끼고, 애정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느끼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런 것들이 중요한 사람이다.
“무조건 잘했다고 말해줘. 그냥 좋은 말만 듣고 싶어”
이제는 그냥 편하게 살고 싶다. 서로의 기질을 따지지 않고 진심이든, 거짓된 위로든 애정과 편안함을 딱 한 스푼 보탤 줄 하는 사람들 속에서 쉬고 싶다. 이해받고 싶다.
그렇게 좀 살아도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