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21번째 항암치료 - 겨울이 되었다
병원의 밤은 일찍 시작된다.
일찍 불을 끄고, 밤이 시작되는 병원이 좋다. 일찌감치 보호자 침대를 펴고 환자의 상태를 살핀다. 잠이 들길 기다렸다가, 준비해 간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고 일기를 쓰며 보내는 밤 시간은 ‘쉼’이다.
김진영 작가의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있다. 엄마와 비슷한 상황에서 차분하게 담담하게 일상을 풀어내는 글쓰기가 좋다. 글을 통해 느껴지는 담담함이 하루하루 깊어지는 병세를 표현하기에 전부 일리는 없겠지만, 조용한 그의 시선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작가는 숨을 거두기 3일 전까지 글을 썼다고 한다. 본인의 일들을 정리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겠지. 책에 쓰인 내용이 생활의 정부 일리는 없겠지만,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의 받아들임의 글이, 내 마음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며 읽고 있다.
엄마와 병원 생활을 하면서 든 생각이 있다.
병세를 받아들이고 마지막을 준비하는 방법에도 그 사람이 살아온 생활방식과 수준(적합하지 않은 표현임을 아는데,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이 영향을 끼치는 건가.
‘시한부’를 드라마나 소설을 통해 배운 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자세가 그에 가까운 줄 알았다. 갑작스러운 판정에 억울하기도 절망하기도 하지만, 담담하게 남겨질 가족들과 자신의 주변정리를 한다.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생계 탓에 엄두를 내지 않았던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기도 한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좋은 경치나 사랑하는 가족들과 눈을 마주치는 장면들이 단골처럼 표현된다.
하지만 내가 겪은 엄마의 마지막은 그런 ‘고상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병원 생활을 지루하고 또 지루하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약해진 엄마는 태블릿이나 노트북을 이용해서 화면을 보는 것도 힘들어했다. 안정감을 준다는 음악 모음을 이어폰으로 연결해 주면 귀에 꽂는 것부터 어색해했다. 엄마 표현에 따르면 무식하고 해보지 않은 탓에, 이런 음악을 들어도 재미가 없다고 했다. 가끔 절에만 다녔기에 집중할 신앙도 없었다. 평소에도 식욕의 욕구가 거의 없던 탓에 간식이나 커피를 마시는 소소한 시간의 즐거움도 몰랐다. 그저 부지런하고 깔끔한 살림 솜씨로 집안일을 하고, 지안들과 등산을 즐겼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건강한 신체를 담보로 하는 탓에 건강을 잃은 엄마의 시간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부 사라져 버렸다.
엄마만의 상황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우리 부모 세대들은 대부분 이런 모습이 아닐까. 알고는 있지만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온 탓에 이제 뭔가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하고 싶었던 것을 하는 고집하는 것도 ‘인내하고 희생하는’ 삶만 살아온 사람에게는 떠올릴 수도 없는 경우의 수인가 보다. 몸의 통증과 함께 마음의 지루함과 싸워야 하는 엄마는 보는 내내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