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었을 순간

생각보다 일찍 다가온 순간 - 2020년 봄

by 하루Haru

응급실에서 입원 병동으로 옮기고, 기약 없는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의사에게 하는 말을 들으니, 변을 못 본 날이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길었다. 왜 내게는 진작 말하지 않았지, 엄마도 단순하게 변비로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님 걱정할까 봐 그랬겠지.

응급실에 오기 3일 전부터 엄마의 배가 평소보다 나와 있을 것을 봤을 때도, 다음 주에 병원에 가는 날이라 생각하고 적당히 걱정만 하고 그냥 넘어갔던 날도 떠올랐다. 암 환자를 위한 단백질 보충 팩을 엄마는 맛없다고 했는데, 억지로 먹으라고 해서 변비가 더 심해진 건 아닐까. 과한 단백질이 변비를 유발한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다. 독소가 쌓으면 복수가 찬다고 하는데, 유기농 식재료를 사용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항암 환차는 위한 질 좋은 반찬 배달도 있던데, 미련하게 융통성 없이 집에서 해 먹는 것만 생각했나. 다 후회였다.


아빠랑 함께 있었으면 아프다고 짜증을 내기도 하고, 아빠는 더 일찍 응급실이라도 가자도 서둘러 병원에 갔을 것이다. 우리 집에 있는 바람에 엄마는 내게 걱정을 끼칠까 봐 자신 때문에 내가 고단할까 봐 참았을 거고, 나는 할 일에만 치중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 잘하고 싶어서 정작 엄마의 상태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결국 둘 모두가 손해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금식으로 기력은 점점 없어지는데, 가만히 누워있지 말고 걷는 운동을 하라는 의사 말에 억지로 엄마를 일으켜 세울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다 귀찮은 엄마는 쉬고 싶어 했지만, 반드시 퇴원해서 대구로 건강한 모습으로 엄마를 보내고자 하는 나의 욕심은 엄마를 괴롭혔다. 나를 생각하면 이럴 수 없다고 반 협박으로 억지로 병원 복도를 몇 바퀴 돌고 온 날 “이제 속이 시원하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서운하고 힘듦에 혼자 울기도 했다.

며칠 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엄마를 두고도 나는 배가 고팠다. 상태가 나빠져 환자를 혼자 두기 힘들 때는 복도 한구석에서 삶은 계란이나 빵을 급하게 먹을 정도로 내 허기짐은 눈치가 없었다.




매일매일 관장을 해야 했고, 화장실을 걸어서 가는 것도 힘든 날이 시작되었다. 14번이나 한 관장은 전혀 효과가 없었고, 둘 다 체념하고 이대로 끝이 날까 봐 조바심이 났던 것 같다. 나는 한 번이라도 더 일으켜 세우고 싶어 했고, 엄마는 조금이라도 더 누워있고 싶어 화를 내는 날이 많아졌다. 밤은 늘 힘이 들었다. 진통제를 맞아야 하는 간격이 일정치 않은 탓에, 밤에 3-4시간 간격으로 간호사를 호출했다. 간호사들도 이해할 수 없이 통증의 간격은 짧아져 갔다. 그나마 엄마가 잘 때는 잘 수 있었던 시간도 섬망 증상이 나타나면서 불가능해졌다. 망상, 환각, 환청, 안절부절못하는 행동 등을 보이는 섬망증은 마약성 진통제를 너무 많이 맞아서 생기는 증상이다. 자다가 갑자기 천장을 보고 웃기도 하고, 허공에 대고 상대가 있는 듯 말을 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내가 누군지 모르는 것 같아서 “엄마. 내 이름 뭐야?” 물으면, “사람을 바보로 안다”며 화를 냈다. 진통제를 줄이면 해결될 일이었지만, 계속 고통을 호소하는 엄마를 보며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족들과 눈 한 번은 맞추면서 마지막 인사는 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진통제에 무조건 의존하는 것도 두려웠다. 오직 나만 이 상황을 보고 알 수 있으니, 나 혼자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고지식한 준법정신은 발휘되는 나에게 짜증스러웠다. 코로나 때문에 입원환자의 면회를 전면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래서 대구에 있는 가족들이 전혀 면회를 올 수가 없었다) 병실에서 대구에서 아들이 서울 결혼식장에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간호사가 “병원에는 안 오시는 거죠?”라며 커튼을 열고 확인을 할 정도로 예민했던 날이었으니, 나의 고민과 결정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분명 모든 사람이 다 지키지는 않을 텐데, 이쯤 되면 나는 준법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남의 눈치나 보는 소심하고 비겁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를 매일, 매 순간 고민했다. 내 전화 한 통에만 매달리는 가족들이 부담스러웠고, 고통스러워 무너져가는 엄마를 혼자 지키는 무서웠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호전되지 않은 엄마의 상황에 의사가 다시 ct촬영을 결정했고, 이제 환자를 더 힘들게 하지 말자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이제 집에 가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