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그리운

내가 가졌던 제일 큰 행운은 엄마였다

by 하루Haru

내 엄마가 친정 엄마임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미혼일 때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을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말을 들을 때는 ‘다 이 정도는 해 주는 거 아닌가’하며 당연하게 여겼다.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쁜 부모의 보살핌을 덜 받고, 뭐든 알아서 하면서 자랐다 생각했다.


엄마가 특별하다는 것은 결혼을 하고, 시댁이 생기고 엄마가 ‘친정엄마’로 불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인천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남편 차로 인천-대구를 이동할 때도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나라도, 정말 멀다는 생각을 들 정도의 거리였다.

엄마는 이 먼 길을 남편과 내 생일,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날이면 혼자 운전을 해서 왔다. 아빠랑 함께 오면 그게 다 우리 일거리가 된다면서 혼자 트렁크에 물건을 가득 싣고 왔다. 위에는 물가가 비싸다며 반찬은 물론이고, 식재료까지 사 왔다. 아이가 쓸 기저귀까지 박스로 사서 싣고 왔다. 남편이 물건을 다 나르려면 3번은 내려갔다 와야 했고, 그러면 관사에 00이네 친정엄마가 온 것이 소문이 날 정도였다. 아닌 척했지만, 으쓱했고 엄마가 들고 온 물건들도 좋았다. 음식 솜씨는 물론 살림도 특급으로 잘하는 엄마가 싸온 짐을 풀어낼 때마다 이런 것까지 요렇게 챙겨 올 수 있나 할 정도로 살뜰함이 느껴졌다. 남편에게도 ‘이런 엄마’를 가졌다는 것이 정말 큰 자랑거리였다.


이런 덩치의 튼실한 딸도 닳을까 아깝다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병원에 왔다 갔다 하는 나를 보며 “쪼그만 게 종종거리면서 다니느라, 안쓰러워 죽겠다. 살이 쏙 빠졌네. 다 닳아서 보이지도 않겠다”라고 하는 엄마에게 그런 건 작게 말하라며,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웃는다고 가족들이 면박을 주곤 했다. 그렇게 엄마는 보잘것없는 나에게 무조건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동생들 챙기며 살림을 하느라, 잠을 느긋하게 자 본적도 시간이 지루할 틈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 어려운 형편은 아니었는데, 공주 같은 외할머니의 챙김을 받기보다는 일을 많이 하는 장녀였단다. 그래서 엄마는 첫째인 나의 수고를 동생들에게 늘 강조하며 우리를 키웠다. 당신의 살림살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내가 동생들을 챙겨야 하는 시간이 좀 있긴 했지만, 동생 말에 의하면 벌써 다 갚았지 않았냐며 언제까지 해줘야 하냐며 툴툴거릴 정도로 가족들이 모이면 단골 소재거리였을 정도로 엄마는 나를 챙겼다.


한 달을 우리 집에 있어야 할 때도 “봐라, 그래도 첫째 일이 제일 많지 않으냐”, 마지막 한 달을 병원에서 보낼 때도 “결국은 너만 골병들게 한다”며 마음 아파했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온 것도, 당신의 딸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이 너무 속상하고 분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엄마의 말을 이해한다. 자신 앞에 닥친 일을 모르는 척하지도, 요령을 피우지도 못할 성격을 타고났을 엄마는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했을 것이다. 본인이 지쳐가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음에도 그만할 수도, 안 하는 방법도 모르니 또 묵묵히 자기 몫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나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했다. 잘한다는 칭찬받을 필요 없고, 못한다는 욕을 먹는다고 사람이 죽지 않는다며, 다른 사람을 위해가 아닌 본인을 위해 살라며. 그런 공은 다 사라지고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며 본인의 삶을 허무하게 생각하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엄마 덕분에, 내가 얼마나 잘 크고 잘 살았는데, 어디 가면 다 솜씨 좋다는 이야기며 잘 키웠다고 하잖아. 나는 엄청 고맙게 생각하는데” 쑥스러운 말이었다, 독한 진통제 때문에 횡설수설하는 와중에도 “제가 더 고맙습니다”라고 허공을 바라보며 말하는 엄마를 보며 울음이 터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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