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의 새로운 저자성
요즘 들어 모니터 앞의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드는 생각은 예전과 사뭇 다르다.
빈 화면이 주는 막막함, 그 백지의 공포는 어느새 챗GPT나 클로드 같은 AI 도구들이 건네주는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프롬프트 한 줄이면 몇 초 만에 그럴싸한 초안이 쏟아져 나오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안도감 뒤편에는 늘 찜찜한 질문 하나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이거, 정말 내 글이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오늘 아침에도 AI에게 주제를 던져주고 초안을 받았다. 문장은 매끄러웠고 논리는 정연했다. 내가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어휘까지 섞여 있어 오히려 나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빠져있는 부분이 있어 이 내용을 넣고 순서를 좀 바꾸고 이 내용은 빼는 게 좋겠다 싶어 다듬긴 한다.
하지만 발행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묘한 죄책감이 손끝을 망설이게 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주제를 정하고, AI가 뱉어낸 문장들을 조금 다듬은 것뿐인데, 이걸 '내 생각'인 양 내걸어도 되는 걸까.
사진가를 생각해보면 조금 위안이 되기도 한다.
사진가는 직접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그저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를 조작할 뿐이다. 셔터를 누르는 건 손가락이지만, 이미지를 포착하고 저장하는 건 기계다.
그래도 우리는 사진가를 작가라고 부른다.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누를 타이밍을 결정하는 그 '의도'가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AI라는 고성능 카메라를 들고 텍스트라는 피사체를 찍는 사진가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방향을 잡았고, 결과물을 선택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다.
카메라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만, AI는 없는 문장을 생성한다. 학습된 수많은 데이터의 파편들을 조합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낸다.
내가 "건강한 식단에 대해 써줘"라고 했을 때 나온 글은, 사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게 아니다. 누군가들의 데이터가 AI의 알고리즘을 통과해 나온 결과물일 뿐.
내가 단순히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했다면, 나는 저자가 아니라 그저 배달부에 불과한 게 아닐까 싶다.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미술관에 갖다 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였을 때,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직접 만들지 않아도, 선택하고 맥락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다.
어쩌면 AI 시대의 글쓰기도 그런 '큐레이션'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문장을 한 땀 한 땀 짓는 장인의 시대에서, 수많은 가능성 중 가장 적합한 것을 골라내는 기획자의 시대로 말이다.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AI의 답변 중 무엇을 취하고 버릴 것인가, 그리고 이 글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는가.
결국 저자성이란 '생성'이 아니라 '책임'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I가 써준 글을 다시 읽어보면 어딘가 허전하다. 영혼이 없다고 해야 할까. 너무 매끄러워서 미끄러질 것 같은 느낌이다.
니체는 피로 쓴 글만을 사랑한다고 했다는데, AI에겐 피가 없다.
이별의 아픔에 잠 못 이룬 밤도 없고, 실패해서 좌절해본 경험도 없다. 그저 흉내 낼 뿐이다.
그래서인지 AI의 글은 논리적일지는 몰라도, 가슴을 툭 건드리는 울림은 부족하다.
결국 이 글이 진짜 '내 글'이 되려면, 그 매끄러운 틈새에 나의 투박한 고통과 경험을 쑤셔 넣어야 한다. 나의 '상처'가 들어가야 비로소 글에 생명이 도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조금은 정리가 되는 기분이다.
내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면, AI는 훌륭한 비서이자 파트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귀찮아서 전적으로 의지해버린다면, 나는 그저 껍데기만 남은 자판기 주인이 될 뿐이다.
이제 글쓰기는 '얼마나 잘 쓰는가'의 싸움이 아니라, '기계의 언어에 나의 온기를 얼마나 잘 불어넣는가'의 싸움이 될 것이다.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경계는 해야겠다. 편리함 속에 내 생각과 영혼이 증발해버리지 않도록.
결국 기계가 쓴 텍스트를 다시 '인간의 글'로 만드는 건, 모니터 앞에 앉은 나 자신의 몫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