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떤 삶이었다고 말하겠습니까?
7년 전에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는 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어.
존재 자체가 흔들렸던 아버님과의 이별…
그런데 어머님이 돌아가시니까 고향이 없어지는 것 같아
적적함 같은 것 있지?
오늘 아침부터 계속 생각이 나는 거야.
아무리 그리워도 돌아갈 곳이 없는 듯한 공허함.
또 만날 수 있을까?
그게 제일 오늘 하루 종일 의문이야.
만날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만날 수 있을까?
한 중년 코미디언이 모친상을 치른 다음 날 한 말입니다. 국민 MC이자 대부로 불리는 그가 남긴 말에 사람들은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날 수 있을까?’ 쓸쓸히 건네는 이 여섯 글자가 깊이 마음에 사무칩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8가지 고통을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생로병사生老病死가 4가지 고통입니다. 이는 각기 울음을 터뜨리면서 세상에 나오고, 늙어 가고, 병에 들고, 죽는 것을 뜻합니다.
나머지 4가지 고통은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 로 나뉩니다. 각각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구하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고통, 평생 무언가 외부적인 것에 동요되고 감정과 생각이 복잡하게 요동치는 고통을 말합니다. 우리는 평생 팔고를 겪습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제, 친지, 친구 등 주변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애별리고)을 겪으면 인생에 회한을 느낍니다. 자신도 늙고, 병을 겪으면서 인생에 대한 허무함도 느끼죠. 결코 쉽지는 않지만, 이런 고통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인생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는 삶의 일부분입니다. 부와 명예를 얻었다고 해도 팔고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영원한 젊음이 없듯이, 누구나 늙고 병이 듭니다. 이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논어>에서도 공자와 제자들이 종종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백우가 불치병에 걸리자 그의 손을 잡고 “아, 죽는 것은 운명이로군.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하며 애통해했습니다.
공자의 애제자인 안연이 요절했을 때는 더욱 안타까워하며, “아,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는구나!”라며 탄식했습니다. 성인으로 불리는 공자라도 죽음은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500년 전 고대의 현명한 학자들은 죽음을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하늘’의 영역이라고 여겼습니다. 한마디로 불가침의 영역인 것이죠.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며, 일어난다고 해도 아주 먼 훗날의 일이라고 치부합니다. 그러나 이를 인지하는 것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다릅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습니다. 내가 내일 당장 세상을 떠난다면 남길 것은 무엇일까요? 죽음에 대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죽음을 다른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오늘 밤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 이 글은 책 <죽음 앞에 섰을 때 어떤 삶이었다고 말하겠습니까?>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