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했을 때 9kg정도 하던 내 배낭은 더 가벼워진 상태였다
다 읽은 책들을 여행 중 만난 친구들에게 나눠 주고
남은 공간에는 6개들이 참치캔과 비스켓 두줄로 채웠다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때, 내가 왜 그 길을 걷기로 했는지이다
물론 계획을 세워놓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존재했는지 조차 몰랐던 길을
이미 걷기 시작한 후에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니.
아마 낮선곳에서의 여행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2시간 여를 걷자 시야는 탈색된 초원으로 바뀌고
도시의 모습은 점차 뒤로 사라져갔다
그제서야 어떤 두려움이 둔해졌던 감각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아까운 시간에 이런 곳에서 순례자 놀이라니
이게 무슨 웃긴 발상인가, 좋게 봐줘봐야
잃어버린 야성을 한번 되찾아 보겠다고 난데없이 괴성을 지르며
속옷차림으로 정글에 뛰어든 타잔워너비 문명인
정도의 모습 아닌가
무슨 기분을 내보겠다고 당치도 않은 만용을 부린건가
문명에서 벗어난지 고작 2시간반 만에 이 심약한 현대인은
갖은 후회에 몸서리치며 스스로를 타박하고 있었다
뒷걸음질 치는 느낌으로 앞을 향해 걷길 반시간
임계점을 지나자 점차 마음이 가라앉으며 도착할 목적지만 생각하게 되었다
배낭을 맨 어깨의 감각도 점점 사라지고
두 다리는 이미 나의 의지를 벗어나 스스로 고른 길을 찾으며 걷고있을 때 쯤
나도 모르는 사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었다
고통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길을 마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나 처럼 나약하고 의심많은 인간이
현실도피마저 좌절되었을 때 내뱉는
자포자기의 넋두리.
그런데 불현듯 어떤 소리가 마음속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이 길이 끝났을 때, 너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 쓰읍
요 지자스 -
이 마른풀떼기 천지에서 도대체 뭔 기쁨을 발견한다굽쇼
무슨 대답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시덥잖은 내용이라니 정중히 사양하고싶었다
하지만 부정하면 할수록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이 길이 끝났을 때, 너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
아 네, 뭐 그러시던가..
그때 끝도 없는 지평선의 길 위에 빨간 점 하나가 나타났다
한참을 걷자 그게 앞서 걷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한 시간쯤을 더 걷자 나즈막히 부르면 돌아볼 정도의 거리까지 좁혀지게 되었다
빨간색 방수점퍼에 군장같은 배낭,
두꺼운 안경을 쓰고 부스스한 머리를 다듬지도 않은
나이가 많지 않아보이는 여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