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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Apr 01. 2022

쿨한 Mum은 못 되겠더라

자식 공부에 집착하는 지질한 어미의 변

나는 세 남매 중 맏이였다.

동생들과 나눠 가져야 하는 부모의 자원과 애정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만 더해지는 바닷물 같은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우리 집은 절대적인 빈곤은 아니면서도(아예 여력이 없었더라면 서로 같은 처지에서 시샘도 없었을 것이다) 세 아이를 충분히 지원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 갈급함이 더 절실했다.


부모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생명체의 숙명적인 경쟁에서 나는 첫째들이 동생들과 경쟁할 때 흔히 쓰는 전략 – 모범적이고 보수적인 아이가 되는 전략 – 을 썼다. 하라는 것을 열심히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 어른들의 말을 더 잘 듣고, 더 눈치 있게 행동하고, 나아가 남들(주로 동생들)에게까지 규율을 엄히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겉에서 보기에는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으로 컸다. 하지만 속으로는 나의 노력에 대해 정당한 인정을 보내주지 않는 부모님에 대한 분노가 쌓여 갔다.


아버지는 늘 내게 더 열심히 할 것을, 더 잘할 것을 요구했다. 아빠의 기준을 맞추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타고난 성정보다 더 멀리 나를 몰아붙이곤 했다.

어머니는 내 성취를 꿀꺽 ‘삼켰다’. 1990년대 한국의 내가 자란 동네는 직접적인 치하와 격려, 따뜻한 말이 오가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선생님, 이웃, 친척들은 아이가 아니라 그 부모에게 칭찬을 했다. 밖에서 나에 대한 칭찬과 부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오면 엄마는 그것을 그저 자식을 교육시킨 본인의 노고에 대한 치하로 여겼을 뿐 아이에게 칭찬을 돌려주지 않았다. 일 년에 단 한 번,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기특하다는 눈빛 한 번이면 충분했을 텐데 그 작은 것들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더 해내기만을 바랬다.


(지금도 부모님께 화나 있거나 서운한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이해하며, 최선의 노력을 하셨다는 것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이다. 아이가 오만해질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도 있었을 테고, 아이에게 부모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 모르셨던 것도 당연하다. 어디를 가든 나와 비교당하던 동생들이 안쓰러웠을 마음도 이해가 된다. 어린 시절 나에게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볼 수 있었거나 한 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현명함이 있었더라면 부모님의 심정도 이해하고 동생들의 아픔과 어려움도 살펴볼 수 있었겠지만, 그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늘 부모로부터 더 열심히 할 것을, 더 잘 해낼 것을 요구받았는데 그게 고등학교까지는 그런대로 할 만했다. 그러다 멀리 있는 대학에 진학해 홀로 생활을 꾸리고 인간관계를 맺게 되자 인생이 좀 더 고달프고 힘들어졌다. 다음 단계로 졸업 이후 맞닥뜨리게 된 사회생활은 그 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으로 난이도가 올라갔다. 당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깔딱깔딱 겨우 버티어 내고 있었다.


각각의 스테이지마다 부모님의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는 점점 더 나를 화나게 했다. 대학교 졸업 즈음 더 이상 못 참고 터졌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죽을 만큼 힘들다’고, ‘얼마나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거냐’고, ‘왜 나만 이렇게 죽도록 힘들게 해야 하는 거냐’고 바락바락 대들었다.

이미 자신의 품을 떠난 다 큰 자식이 분출하는 분노 앞에 아빠는 작고 난처해 보였다.

“열심히 해야지 우짜겠노.”

그제야 나는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에 속뜻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릴 때는 “고생했다. 잘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해 주렴.”이었고 나중에는 “너는 내 자랑스러운 딸이다. 너를 믿는다.”였고 그다음엔 “너의 어려움에 도움이 못 되어 안타깝구나. 많이 힘들겠지만 잘할 수 있을 테니 힘을 내렴. 우리가 늘 응원하마.” 였을 것이다.

그저 주어진 것을 열심히 하는 방식으로 사셨던 아빠의 인생 경험으로는,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 ‘열심히 해라.’는 조언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슬퍼졌다.




나는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에게 목메지 않겠다고, 부모로서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나의 인생을 열심히 살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지 않겠다고, 아이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겠다고, 아이의 성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때그때 칭찬해 주겠다고,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 특히 칭찬과 사랑의 표현을 돌리지 않고 정확하게 말해 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세상 그 어떤 엄마보다 아이의 개별성과 독립성을 존중해 주는 좋은 엄마가 될 것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아, 나는 정말, 내가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가 영유아기를 지나 학령기가 되니 내가 점점 이상해지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내가 부모님과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에게 거는 기대가 점점 더 커져갔다. 내가 가져보지 못했던 기회를 아이에게 준다면, 내가 했던 실수를 미리 알려 주어서 그것만 피하게 한다면, 내가 뒤늦게 깨달은 삶의 지혜를 아이에게 더 일찍 가르쳐 준다면 아이는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훨씬 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 보고 개성을 존중해 주는 것이 말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내 유전자의 반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나를 닮은,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느끼는 유대감과 연결성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강렬했고 내가 통제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느낌이 동물로서 당연한 진화론적 성향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어미가 새끼에게 이토록 강한 연결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나 자신의 확장체로 여기지 않는다면, 인간이라는 종이 그 길고 유약한 유년기를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수십만 년 진화 과정 동안 어린 새끼는 어미와 눈을 맞추고, 표정을 따라 하고,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주는 방식으로 어미가 느끼는 그 연결성과 동질성을 더욱 부채질하는 생존 전략을 강화해 왔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연유로 나 또한 아이를 별개의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확장체, 나아가 나의 업그레이드 버전이 될 것이라는 태도를 은연중 갖게 되었다.

나의 확장체이자 업그레이드 버전인 아이는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했던 실수, 시행착오, 주위에서 준 도움은 싹 잊고 나 혼자 잘나서 처음부터 스스로 다 했던 것처럼.


아이가 저절로 깨우치거나 한 번 만에 알아듣고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밥 잘 먹고 똥만 잘 싸도 기특했던 아기 때와는 달리, 칭찬과 감탄은 점차 희귀한 것이 되었다. 몇 번을 가르쳐 주어도 모르는 것은 답답했다. 점점 나무랄 일만 많아졌다. 해야 할 일, 주로 공부나 숙제를 하기 싫어하니 자꾸 내가 아이를 질질 끌고 가는 모양새가 되었다. 한 번에 안 되는 것은 끈기 있게 고민해 보거나 다시 시도해 보아야 할 텐데 쉽게 포기하고 짜증을 냈고, 그걸 보는 나는 화가 났다. 내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동기, 즉 아이에 대한 사랑은 나 스스로도 잊고 아이에게는 자꾸 잔소리만 하게 되었다.


아무 생각 없이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저절로 이런 엄마가 되어 있었다.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걸고 자녀의 성취에 내 모든 것을 바치는 수많은 여자들을 보며 난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세상 모든 엄마들이 못나고 깨우치지 못해서 아이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가 되어 보기 전에는 끝까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절로 이렇게 되는 동물적 본능을 자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또한 필요하니 발전한 진화적 경향성 아니겠는가. 기껏해야 한 생애 살고 가는 한 개체가 어찌 진화적 본성을 거스르겠는가.


하지만 어떤 부모라도 아이가 한 인간으로서 독립해 가야 하는 사춘기 즈음에는 이 집착을 거두어들여야 할 것이다. 그때 필연적으로 느낄 상실감을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 다행히 아직 최소 5~6 년은 엄마 아빠가 최고인 줄 알고 부모 품 안에 있을 때이니 충분히 그 시기를 행복하게 채워야겠다.

동물적 본능으로 아이에게 몰두하는 나의 경향성은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지만, 필요 이상 과도해지지 않도록 늘 의식하고 조절해야겠다.

세월은 한 방향으로만 흐를 테니, 아이는 점차 커질 것이고 나는 점차 작아질 것이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아이가 나를 뛰어넘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겠지만(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나 또한 인생의 언제까지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고 싶다. 아이가 부모를 뛰어넘는 순간에도 부모에게 실망하지는 않도록, 느린 속도이더라도 성장하고 발전하는 모습이고 싶다. 아이에게 적정 수준 이상으로 집착한다 싶을 때엔 내 인생에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돌아봐야겠다.



... 물론 뜻은 고상하고 말은 거창하지만 현실은 참으로 저차원적이다.

당장 아이가 하교하면, 흡~ 하~ 흡~ 하~ 심호흡을 하고 스펠링 시험 결과를 확인하고, 화를 내지 않고 잘 가르쳐 줘야지. 하기 싫어하는 쓰기 숙제도 달래 가며 시키고, 자꾸 잊어 가는 한글과 연산도 조금은 시켜 봐야겠다. 그래도 싫다 하면 쓸데없는 자존심 줄다리기는 하지 말고 그냥 멋진 계절과 풍경을 즐기고, 아이랑 신나게 놀아야겠다.

이 마음 잊지 않도록, 매 순간순간 되새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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