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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Apr 08. 2022

왜 영국에서는 역사가 재미있을까

난생 처음 느껴보는 역사의 재미


이곳에 와서 영국에 관심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인터넷도 보고, 책도 보고, 넷플릭스나 영화를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이 역사가 참으로 재미있고 유용하다는 것이다. 


너무 뻔하고 식상한 깨달음이지만, 이것을 직접 느끼는 건 참 신기한 것이었다. 누군가 ‘굉장히 인문학적인’ 사람들은 늘 하던 말이었지만 평생 내가 직접 느껴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사가 재미있다니. 토종 한국인으로서 중/고등학교 시절 6차 교육과정에 따라 정규 교육을 받는 내내 역사란 고리타분하며 지루한 암기과목일 뿐이었는데.


왜 그런 것일까? 왜 한국에서 배웠던 우리 역사는 그렇게 재미가 없었을까? 내가 특이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 시절이 특히 그랬고 요즈음엔 다를까? 애초에 인간이란 어릴 때보다는 다양한 삶을 직접 경험한 후에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찬찬히 생각해 본 결과, 영국에서 보고 배우는 영국 중심의 역사가 한국에서 배우는 역사보다 재미있는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첫째로 지리적 특성 때문에 한국사(와 동아시아 역사)는 실제로 유럽사보다 '재미가 없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은 서쪽 끝에 비해 지형이 단조롭다. 이런 자연환경에서는 비등한 규모를 갖춘 세력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기 어렵고, 등장인물이 적은 역사적 상황 하에서는 발생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종류도 제한적이다. 

유럽의 지리적 특성은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도 말했듯이 오밀조밀하고 다양하며 분리되어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및 중동지역, 오늘날의 프랑스와 독일 등 서유럽, 영국, 아일랜드 및 북유럽이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유럽 영토는 바다와 산맥들에 의해 자연적으로 여러 개로 나뉘어 있었다. 

이런 복잡한 영토를 한 세력이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효율성이 지극히 떨어져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러다 보니 유럽사에서는 스페인 왕가, 합스부르크, 잉글랜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 바이킹, 이슬람 세력과 투르크 등 엇비슷한 세력과 부를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있고 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상호작용도 연합, 동맹, 배신, 정복, 굴종, 반란, 혁명, 결혼으로 이어지는 혼테크 등 다양했다. 

이런 다양한 상호작용은 역사의 드라마를 더 풍요롭고 재미있게 만들어주기도 했고, 상호 간의 경쟁과 학습을 촉진하여 사회의 경쟁력도 올려 주었을 것이다. 또 다양한 상호작용으로 인해 사회변화의 폭과 속도도 빨랐으니 역사의 스토리가 전개되는 배경도 다채로워지고 비슷한 이야기들도 르네상스, 바로크, 리젠시, 빅토리안 시대 등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가 가능해진다. 


반면 한, 중, 일 3국이 위치한 유라시아 최 동쪽 끝단은 상대적으로 훨씬 단조로운 지형이다. 바다나 산맥으로 막히지 않은 광활한 중원의 대륙이 있고, 그 끝에 툭 튀어나와 지형적으로 분리된 한반도, 바다 위 섬 일본 열도가 있을 뿐이다. 이 세 구역을 한 번에 통일시켜 한 세력이 통치하기에는 비용 대비 실익이 크지 않았을 것이므로, 역사 기간 내내 이곳에서는 (소소한 침략전쟁은 끊이지 않았으되) 대체로 3국이 각자 중앙집권의 단일한 통일 왕국이 이어지는 구조로 독립적으로 발전해 왔고 세력 간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우열 관계도 너무나 명확하여 변화가 거의 없었다. 

이렇게 고정된 역할 사이에서는 발생할 수 있는 상호작용의 종류가 무척 제한적이다. 왕과 귀족 사이의 권력다툼, 적장자가 없을 때 왕권 이양과 관련한 암투, 한 국가가 다른 국가로 대체되는 시기의 혼란, 개성적인 특성을 가진 몇몇 리더의 일탈적인 이야기, 가끔 있었던 인접국과의 전쟁 스토리, 왕의 관심을 두고 싸우는 조신들이나 처첩 간 갈등 정도가 이야깃거리로 나올 것이다. (너무 익숙한 우리 역사와 옛이야기 구조들이다.) 심지어 변화도 느려 근현대로 오기 전까지는 사회, 문화적 배경도 큰 차이 없이 비슷비슷하다.

동양에서 가장 재미있는 역사물인 초한지, 삼국지 등이 등장할 수 있었던 시기는 거대 통일왕국이 몰락하고 다양한 세력이 등장하여 경쟁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그런 시기가 너무 짧고 희귀했다. 

그러다 보니 유럽 역사물은 팩션(Fact+Fiction)만으로도 풍부한 스토리가 나올 수 있는데 우리 사극은 어느 순간 시간여행 같은 판타지와 결합하는 방식으로밖에 돌파가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둘째로 19세기 이후 근현대사의 개성적인 특징 때문에 한국 역사는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는 근대 제국주의 확산 및 1,2차 세계대전과 공산화를 전후로 너무 불연속적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에 그 전의 역사가 현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못했다. 

21세기 우리의 인간관계, 사회제도, 경제원리, 국제관계는 모두 타자에 의해 발전되어 ‘완성형’으로 도입된 다음 짧은 시간 갑자기 적용되어버린 시스템이다. 역사에서 배우는 것과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연결고리가 보인다면 현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흥미도 생길 텐데 우리 역사는 그렇지 않다. 그 전 시대까지 우리 역사에서 있었던 인간관계의 양상은 너무 고정적이며 상하관계가 확실하여 현대사회에서 변주되기 어렵고 교훈을 얻을 기회도 제한적이다. 사상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현대사회와는 너무 거리가 있어 오늘날의 우리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반면, 영국에서 Year1부터 가르치고 있어 깜짝 놀랐던 ‘마그나 카르타’를 생각해 보자. 자국의 역사이면서, 왕과 귀족들의 세력다툼은 아이들의 언어로도 재미있게 인과관계를 엮을 수 있고,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오늘날의 가치와 직결되므로 아이들에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제국주의 팽창 역사,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달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역사이면서 동시에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 어떤 시행착오를 거쳐 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은 이곳에서도 예외적인 사건이지만 그 배경이 모두 유럽사 내재적인 것이고 그 안에서도 주체적인 플레이어였으므로 ‘연속적인’ 역사로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전쟁 이후에도 그 전의 역사적 유산들이 단절 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유럽사를 공부하는 것이 우리의 현재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셋째로 우리 역사는 약자의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때문에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할 수 없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우리의 현재 모습을 이렇게 만든 가장 결정적이었던 사건들(제국주의, 2차 대전, 한국전쟁)이 모두 타의에 의해 우리가 유린되던 것이었으니 이를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기술하기는 힘들 것이다. 아예 영원히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성숙한 개인들조차 집단을 이루면 더 이기적으로 구는 것처럼, 개인 단위보다 사회 단위에서 자기반성은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설상가상으로 근현대 이후 이쪽과 저쪽으로 갈라진 진영이 생겼고, 머리가 굳지 않은 아이들에게 어떤 식의 내러티브를 주입할 것이냐를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늘 대치가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민족주의적 의도가 늘 우세를 점했던 것 같다.(20~30년 전 이야기이므로 현재 역사교육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반만 년 이어져 온 단일민족, 단일 국가 역사는 물론 특이하고 자랑스러운 것일 수 있지만 세계화된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부적절한 측면이 많아 보인다. 한국 역사교육이 지역적으로 고정된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 통사 방식이 된 것은 역사적 맥락도 있고 분명 장점도 있을 것이다. 모든 한국인이 한국 통사를 배우면서 한국인만이 공유하는 민족의식과 개성이 형성될 것이며, 이는 분명 동질적인 세계화 시대에 장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계사를 중심으로 한 다른 방식의 역사 교육이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혜택 -현재에 대한 이해, 인간의 행동방식과 역사를 움직이는 원리에 대한 지혜, 무엇보다 역사를 배우는 재미 자체 등- 에 비해 지금 방식은 잃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나이 40에 역사의 재미와 혜택을 느끼자니 이것이 참 즐거우면서도, 어릴 때 그렇게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서 배운 역사가 다 뭐였던가 싶어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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