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식물 선호 취향을 살짝 숨기는 편이었는데, 그런 취향은 왠지 내보이고 싶지 않은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물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교외에서나 길가에서, 화단에서 보이는 식물들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모양을 자세히 관찰하고 가능하다면 뜯어서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냄새와 촉감을 느껴 보고 계절마다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초록색을 좋아하고 풀과 나무가 있는 곳을 좋아하고 풀냄새와 꽃냄새, 흙냄새를 좋아하는 것이다. 꽃집이나 정원에서, 식물원이나 열대 리조트에서 식물 구경하기를 좋아하고 식물 그림과 백과사전 같은 책을 좋아하는 것이다. 식물 그림을 그리고, 화분을 기르며 가끔 꽃을 사는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며, 생산적인 무언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소하게 돈을 쓰며 사람들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있게 하는 것이어서, 야무진 엄마로부터 혹은 실용적인 배우자로부터 ‘쓸데없다’는 평가를 듣기 딱 좋다.
가까운 이들로부터 듣는 당장의 핀잔 외에도, 식물 선호 취향을 스스로 검열하게 되는 좀 더 근원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식물’이라는 것은 이름에서부터 ‘동물’과 대비되는 수동성을 내포한다. 동물은 한자로 움직일 동(動)을 쓰며 영어 Animal이라는 단어 또한 Animate, 즉 살아 움직임, 생동한다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하지만 식물은 동양(심을 식, 植)에서도 서양(Plant, n.식물 v.심다)에서도 그저 외부에 의해 결정된 위치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식물의 본질이란 ‘심겨짐’으로써 결정되는 운명과 스스로 그것을 바꿀 수 없음, 그런 수동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주어진 환경을 숙명이라 여기고 묵묵히 감내하는 것, 그리고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른 삶을 살아가는 것. 둘 중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방식이 무엇일까?
글쎄, 100여년쯤 지난 뒤 기후변화의 영향이 너무나 커지고 생물다양성이 절망적인 수준으로 붕괴된 이후에는 좀 달라져 있으려나? 하지만 아직은, 산업혁명 이후 2~300년 간 이어져 온 현대 선진국에서 널리 공유되는 문화권 안에서는 당연히 후자일 것이다. 변화와 개척, 능동성. 그 규모와 속도는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을 만큼, 크면 클수록 좋고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다.
이런 문화 아래에서 ‘식물을 좋아하는 취향’은 비즈니스 확장, 트렌드 선도, 투자 같은 공격적인 주제들에 비해 유약하고, 느리고, 조용하며, 무해하지만 시시한 것으로 느껴졌다. 식물 선호 취향이란, 무한경쟁의 시대에 생존에 좀 더 부적합한 형질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같았달까.
그래서 나는 (스스로의 취향에 가치판단을 할 줄 몰랐던) 어린 시절을 지나온 후로는 남몰래 조용히 ‘애호활동’이라 할 만한 것들을 해 왔다. 고등학교 독서실에서부터 대학교 하숙집, 자취집에 이르기까지 ‘나의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곳에는 작은 화분 하나쯤 들여놓는 방식으로, 경제적인 능력이 생기고는 보태니컬 아트 책을 사거나 식물 인테리어가 멋진 카페를 단골로 삼는 방식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서는 주말에 야외로 나가고 산과 공원으로 나가는 방식으로.
화분에서 돋아나는 잎과 꽃들은 기특했고 할머니 댁 대숲(竹林)의 명암대비는 장엄했으며 라벤더나 로즈마리 허브 향은 이국적이었고 열대 섬의 수풀은 짙고 열정적이었다. 가끔 남대문 꽃시장에 가서 신선한 장미향을 맡을 때면 어린 시절 할머니 댁 꽃밭의 분홍색 겹장미와 새벽 이슬이 떠올랐다. 대학 때는 ‘생활원예’라는 교양과목을 들었고 잔디의 여러 종류와 습성을 배웠다.
많이 좋아하는 것들은 사진을 찍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늘 그림을 그려 보는데, 손이 말을 안 듣고 눈이 침침해서 내가 직접 그려낸 것들은 처참했지만 수채화부터 정교한 아크릴화까지 훌륭한 작가들이 그려낸 보태니컬 아트를 보는 것은 황홀했다.
그러다 영국에 왔더니 조용히 숨기고 있던, 나 스스로도 잘 의식하지 못하던 식물 선호 취향이 튀어 올라왔다. 여기는 대놓고 나무와 풀과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영국에는 교외에서 도심까지 크고 작은 푸른 공원과 왕립 정원이 곳곳에 퍼져 있다. 하이드파크, 켄싱턴 가든, 세인트제임시즈 파크, 리젠트 파크처럼 도심 안에 있는 크고 유명한 공원들도 아름답다. 그리고 약간 외곽으로 나간다면 리치몬드 파크, 햄튼 코트, 큐 가든도 멋지다.
이들 공원은 대체로 왕실 소속 정원이나 사냥터였다가 대중에 공개한 경우가 많다. 켄싱턴이나 햄튼 코트, 큐처럼 로열 팰리스가 같이 있는 경우도 많고, 위치도 매우 중심가이거나, 외곽이라면 매우 거대한 규모이다. (이중 켄싱턴 팰리스, 햄튼코트 팰리스, 큐가든은 유료이고 나머지는 무료이다.)
템즈강 상류에 있는 큐가든(Kew Garden)은 왕립 식물원(Royal Botanic Garden)으로, 입장료가 성인 기준으로 2~3만 원 정도이니 꽤 비싼 편인데도 주말이면 이곳을 방문하려는 가족단위 인파로 근처 도로가 정체가 될 만큼 런던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차를 가지고 좀 더 나갈 수 있다면 수없이 많은 내셔널 트러스트 소속 저택과 정원들이 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운영 위기에 처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들을 사들여 관리하면서 유료로 대중에 개방하는 기금이다.
동네 곳곳의 작은(실제 사이즈는 결코 작지 않다!) 공원들도 충분히 아름답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웨스트 런던 인근에서는 치직(Chiswick) 하우스, 사이언(Syon) 하우스, 거너스버리(Gunnersbury) 파크 등이 있는데 외부는 공원으로, 내부는 소규모 뮤지엄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들도 과거 귀족들의 저택이었던 곳으로, 지금도 ‘브리저튼’ 같은 영국 시대물을 찍을 때 촬영 장소로 활용된다.
그레이터 런던의 Zone 3에 해당하는 이곳들은 19세기까지만 해도 런던으로 편입되지 않은 교외 지역이었고, 귀족들이 여우 사냥 철이 시작되는 9월 정도부터 의회가 시작되기 전 겨울까지 머무르는 Country house들이라고 한다. (참고로 1월부터 여름까지 사교철에는, ‘브리저튼’에 잘 나오는 것처럼 런던 시내의 타운하우스에 머무르며 비즈니스와 사교, 구혼 작업을 했다고 한다.)
왕립 가든이나 귀족들의 영지였던 곳 말고 동네 골목길만 다녀도 잘 가꿔진 가정집들의 앞뜰을 구경할 수 있다. 영국에는 정말로 가드닝에 진심인 사람이 많아서 자신들의 정원을 살뜰히 가꾸는 사람이 많다.
디테치드, 세미-디테치드, 테라스드, 플랏 등 영국 집의 유형은 프라이빗 정원을 몇 면이나 가질 수 있는지에 따라 나뉜다.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당연히 개별 정원을 여러 면에 많이 보유할수록 더 좋은 집이다. 영국 남쪽은 워낙 평지가 넓어서인지 단독주택(디테치드, 세미 디테치드, 테라스드 하우스를 모두 단독주택으로 칭한다면)이 압도적인 주택 유형이며 그러다 보니 정원 가꾸기 취미를 갖기 쉬운 환경이다. 혹은, 워낙 정원 가꾸기를 좋아해서 아파트(플랏)의 선호도가 잘 올라가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반 가정집들의 경우, 나 같은 외부인은 바깥으로 노출된 앞마당까지는 슬쩍 엿볼 수 있지만 메인이 되는 뒷마당은 초대받아 들어가지 않는 한 볼 수가 없다. 기왕이면 영국에 사는 동안 정원이 있는 정통 영국 가정집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대체로 오래된 집들의 연식, 문제가 생겼을 때 수리의 어려움, 안전상의 우려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못 해볼 것 같다. 나나 남편의 지인, 아이의 친구 집 등 마당이 있는 영국 집들에 초대받아 가 본 적도 있지만 모두 영국에 사는 한국인이나 다른 유럽 출신의 외국인들이어서 정통 영국인들의 표준적인 가든은 어떨지 궁금하다.
케이티 폭스가 쓴 ‘영국인 발견’이라는 책에서 보면 ‘집 앞 정원’과 ‘뒤뜰 공식’이 있다. 여기에 따르면 “앞뜰은 뒤뜰보다 보기 좋을뿐더러 손질도 잘 되어 있다. (앞뜰은) 다른 사람이 즐기고 감탄하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즐기기를 허가받은 뒤뜰은 비교적 어수선하고 개성도 없다. 영국 뒤뜰의 기본 형태는 높은 울타리, 포장된 곳 조금, 잔디 조금, 길 꽃밭,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의 뜰은 안심해도 좋을 만큼 예외가 없고, 죄다 판박이임을 누구든 금세 알아챌 수 있으며 편안할 정도로 익숙하다.”라고 한다.
하지만 영국인의 특성 중에는 ‘자기 비하 농담’이나 ‘진지하지 않기’도 있기 때문에, 그 자신이 영국인인 케이티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될 것 같다. 아마도,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멋지게 꾸미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영국에는 살짝만 도심에서 벗어나면 곳곳에 ‘가든센터’라고 불리는 쇼핑몰들이 있다. 가든센터는 씨앗과 모종부터 삽, 장화 등 온갖 가드닝 용품은 물론 야외용 가구까지 파는 종합 쇼핑몰인데, 카페나 레스토랑, 서점, 그리고 동식물과 같은 자연을 테마로 한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을 판매하는 상점도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영국에서 코로나19로 인한 전면 락다운 이후 가장 먼저 영업 재개가 허용된 곳이 가든 센터였다는 사실이, 영국인들이 얼마나 정원 가꾸기에 진심인지 짐작할 수 있는 단면이 아닐까?
유럽인들의 특성을 빗대 하는 말 중에 “의식주 중에서 프랑스인은 먹는 것에, 이탈리아인은 입는 것에, 영국인들은 사는 집에 미친 사람들이다.”라는 말이 있다. 또 영국인들이 경제적으로 비참한 상황에 대해 표현하는 말 중에 “가꿀 정원 한 뼘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영국인들은 약간의 여유라도 있다면 자기 집 정원과 집 가꾸기만은 열정을 다한다는 뜻이리라. 비록 옷은 기능에만 충실한 멋없는 옷만 입고 음식도 어지간히 맛없는 것들만 먹더라도 말이다.
물론 가든센터에 오는 손님들은 대체로 우리 부모님 또래 이상의 앵글로색슨 계열의 백인들인 것으로 봐서, 정원 가꾸기는 나이 많은 정통 영국인들이 더 즐기는 취미인 것 같기는 하다. 또한 런던 외곽에 새로 개발되는 주거지역에는 대체로 현대식 플랏들이 들어서고 있다. 정원이 있는 집을 관리한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정성과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들었으)므로, 치솟는 주거비를 감당하기 위해 대체로 맞벌이를 해야 하는 요즘 세대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과는 다르게 영국에서는 이 플랏에 사는 사람들조차도 외부로 뚫린 테라스에 야외용 가구, 화분들을 배치해서 어떻게든 가든 느낌을 내려 한다는 느낌이 든다.
정원과 자연과 식물에 대한 영국인들의 사랑이 참 재미있고, 이들의 아름다운 정원을 같이 즐길 수 있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