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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May 10. 2022

왕립식물원 Kew

영국 런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영국에는 무료로 즐길 거리가 꽤 많다.

바로 옆 프랑스나 이탈리아만 해도 주요 관광지 중 무료입장이 가능한 곳은 거의 없는데 비해 영국에서는 브리티시 뮤지엄, 내추럴 사이언스 뮤지엄과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모던 갤러리 등이 모두 무료로 개방된다.

시니컬하게 보자면 ‘대부분 전시품들을 모두 외국에서 훔쳐온 건데 당연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국 중심의 이기주의가 당연해져 가는 시대에 이런 공공서비스를 유지한다는 점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영국에 잠깐 관광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보통 이런 유명한 곳들을 다 보고 나서 다른 즐길 거리를 찾게 되는데 그게 어디든 관람료가 적지 않다. 우리 가족 셋만 간다 해도 대체로 십만 원이 훌쩍 넘기 십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대부분 어트랙션들이 터무니없이 비싼 1회 입장권 금액에 비하면 비교적 경제적인 1년짜리 멤버십들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1년에 3번 이상만 간다면 본전을 뽑는(?) 구조이다.


당연히 이런 멤버십들은 포괄하는 범위가 넓을수록 유리할 텐데, 이게 또 그렇게 고객 친화적이지는 않다. 관광산업에도 대처리즘의 무자비한 민영화의 여파가 피해 가지 못한 탓일까? 운영 주체들이 제각각인 듯하다. 그래서 자신의 상황에 맞춰 - 차가 있는지, 여름방학 같은 피크 시즌에 집중적으로 이용할 것인지, 유적지/키즈/도심/자연 중 어떤 분야에 관심이 많은지 등 - 선택해야 한다.



나는 최근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큐 가든의 1년 멤버십에 가입했다. 큐 멤버십은 다른 어떤 동물원이나 식물원, 유적지와도 호환이 안 되고 오로지 큐 가든에만 적용되는 멤버십인지라, 특별히 식물과 가드닝에 애정이 있지 않고서는 가입을 결정하기 약간 애매한 면이 있다. 특히나 큐 가든 밖의 템즈 강변이나 큐 브릿지도 멋지고 무료인 리치먼드 파크도 멀지 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렇게 퍼블릭 파크에 다니면서 큐 가든의 높다란 담장만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봄빛이 짙어져 갈수록 도대체 저 담장 안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체리 블러썸도 다 져 가는 4월 말에 드디어 큐 가든에 오게 되었다.


큐 가든의 정식 명칭은 ‘왕립 식물원 큐(Royal Botanic Gardens Kew)’이다. 17세기 한 귀족이 외래종 식물원을 조성한 것을 기원으로 하여 1840년 정식 왕립 식물원이 되었다고 한다. 2003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고, 현재 약 40만 평의 부지에 전 세계의 식물 3만 종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135만 명이 찾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유리 온실인 ‘Palm House’와 세계에서 가장 큰 온실 ‘Temperate House’를 비롯해 다양한 열대/온대 온실과 넓은 영국식 정원, 바위 정원, 일본식 정원, 중국식 파고다 등이 이곳에 있다.


왕실 소속이다 보니 이곳의 풀 한 포기, 백조 한 마리조차 모두 여왕 소유이며 지금도 관련 기념일의 행사 때는 이곳에 로열패밀리가 방문한다. 아이들의 놀이공간으로 꾸며진 Children’s Garden도 있고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연중 이어져 주말에는 가족 단위의 런던 시민들이 피크닉을 즐기고, 평일에는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선생님과 스쿨 트립을 온다. 내부에는 조지 3세가 기거했던 큐 팰리스(Kew Palace)도 있고, 작은 갤러리 및 곳곳에 카페테리아와 레스토랑도 있다.


그런데 사실 (Kew를 비롯한) ‘식물원’이란 것이 현대적인 의미처럼 대중에게 휴식과 관람의 목적으로 공개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고, 애초의 목적은 의학/식품/공학/학술적 목적으로 식물 유전자를 수집, 축적, 보존하고 연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18세기 영국은 식민지 확장 시 군대보다 앞서 ‘식물 사냥꾼(Plant Hunter)’을 먼저 보내 세계 각지에서 유용하고 희귀한 식물들을 수집해 오도록 했다고 한다. 이들 식물학자들은 스파이나 침입자로 여겨져 원주민들에게 학살당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 들여온 식물이 차, 고무나무, 커피, 카카오, 바나나, 자두 등이다. 유럽 제국들은 경제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식물자원은 자국 내 식물원에서 품종을 개량하여 다시 식민지로 가져가 대규모 농장을 경영했다고 한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플랜테이션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영국 식물원의 역사에는 영국의 식민지 개척과 탐욕스러울 만큼 왕성한 수집욕, 제국주의 정신이 반영되어 있다. 가든 내 곳곳에서 ‘식물 자원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숭고한 역사적 위업’을 했다(하고 있다)는 식의 자국 중심적인 서술을 볼 때마다, 식민지 피지배 경험이 있는 한국 국민으로서 나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상당히 불온하지 않았나?’, ‘그걸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는구나.’ 싶어 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국인 전체가 아니라 이들 식물학자들에게 한정해 본다면, 이들은 지극히 학자적인 순수함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인간사에서 대체로 사회/경제보다 자연/과학에 몰두하는 괴짜들의 뒤에는 이들의 성취를 이용하는 세력들이 따로 있게 마련이니(물론 개중에는 그 모든 것 - 학문적 성취뿐 아니라 명성과 부(富)까지 - 을 쟁취했던 능력 좋은 이들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문화적/종교적 맥락까지 고려해 볼 때, 이 학자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규칙을 발견하고 하나하나에 이름을 부여한다는 사명감마저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이 목숨 걸고 가져온 식물은 대체로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열대우림 혹은 건조한 사바나 기후에서 자라는 것이었으니, 차가운 유럽 기후에 맞을 리가 없었다. 수집해 온 식물들의 90% 이상이 적응에 실패하여 초기에 죽었다고 한다. 때마침 유럽에서 유리 제작 기술이 널리 발전했고, 곳곳에 거대한 유리 온실이 지어졌다.


큐 가든의 Palm house는 19세기 중반에 지어진 거대한 유리 온실이다. 그때부터 아직까지 살아 있는 식물도 있다.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열대 우림 식물들이 자라는 곳으로, 큐가든의 3대 온실 중 온/습도가 가장 높다. 무거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선 습하고 후끈한 한국 여름 날씨에 깜짝 놀라고, 다음으로 짙푸른 열대우림의 풍경에 압도된다. 19세기풍의 철제 골격의 우아한 곡선 때문에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보기에도 참 아름답다.


외부의 넓은 정원들도 참 좋다. 장미정원, 여왕의 정원, 수중 정원 등 여러 테마의 정원들이 있다. 가든 안에는 중국풍의 탑형 건물(Pagoda)과 일본식 정원들도 있는데, 한국의 것이라고 소개된 것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동아시아 식물들이 있는 곳에서는 안내문을 읽지 않고도 한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대나무 숲, 철쭉, 동백나무들 사이를 지나면 어린 시절 할머니댁 시골길 어딘가의 정취가 느껴진다.


이들 야외 정원은 각국에서 유래된 다양한 식물들로 꾸며져 있다. 지난 글에서 쓴 것처럼 어디를 가든 식물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는데 영국의 식생은 대륙 국가들에 비해 이국적이며 훨씬 다양한 편이다. 바다 건너 프랑스만 해도 한국에 비해 특별히 식생이 새로워 보이지 않는 데 비해 영국은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식물이 참 많다. 처음에는 이것이 지리적 이유나 기후 때문이라고 - 영국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라는 점에서 -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오히려 영국인들의 호기심과 수집욕, 정원 꾸미기 취미 같은 인위적인 이유가 더 큰 것 같다.


대표적인 사례로, 동네 도서관에 가는 길 어떤 집 앞마당에 이런 나무가 있어 볼 때마다 신기하게 여겼는데 큐가든에서 이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됐고, 이후 어느 동네에서건 가끔 이 나무를 목격하게 된다.

현재 영국에는 자생종의 열 배가 넘는 외래종 식물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인들은 식물의 원산지를 딱히 구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도에서 유래된 커리를 영국인 입맛에 맞게 변형한 ‘치킨 티카 마살라’를 거리낌 없이 ‘영국 음식’이라고 소개하는 것처럼, 일단 브리튼 땅에 오고 나면 그냥 자기네 것으로 흡수하는 것 같다.


이런 태도는 ‘토종’과 ‘외래종’에 대한 구분이 익숙한 한국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 우리의 경우 어떤 동식물에 ‘외래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 언제나 ‘생태계 교란’ 같은 문구가 동행하며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동으로 입혀는 경향이 있다. 나의 경우 아주 어릴 때부터 ‘외래종’이라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할머니댁이 있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황소개구리, 배스, 미국자리공 같은 동식물을 미워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토마토, 감자부터 시작해서 유용한 외래종 동식물도 너무나 많을 텐데, 우리는 꼭 불균형이나 문제 상황이 펼쳐질 때에만 ‘외래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같기도 하다. 단일 민족으로서의 주체성이 워낙 강하고, 주로 외국에 침략당해 왔던 역사 때문에 우리 안에는 기본적으로 외부 세력의 침범에 대한 적대감, 불안감이 한 겹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큐 멤버십 가입 후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매주 2~3번 이상 출근도장을 찍고 있다. (그동안 가입을 왜 망설였는지 모르겠다.)

혼자서 아침 산책을 하기도 하고, 아이 학교 친구 엄마와 함께 와서 오랑제리 카페에서 수다도 떤다. 학교를 마친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길에 저녁 도시락을 싸 와서 바로 큐가든으로 가 둘이서 오후 햇살을 즐기며 피크닉도 한다. 주말에 온 가족이 함께 와서 Children’s park에서 놀기도 한다. 이렇게 심심하면 방문하는데도 워낙 넓어서 올 때마다 새로운 장소를 발견한다.


5월부터 9월까지 Summer season에는 멤버십 고객에 한해 Early entry가 가능한데, 정식 개장시간이 되기 전에 와 보면 수많은 정원사들이 땀과 정성으로 한 포기 한 포기 식물들을 가꾸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동식 스프링클러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고 있는 식물들에게선 즐거운 감정이 전달되는 것 같다.

폐장 직전의 늦은 오후 햇빛 아래에서도 예쁘다. 요즈음 공원에서 사는 오리, 백조, 거위들의 새끼가 태어나는 철인 것 같은데, 가끔 엄마를 따라 뒤뚱거리며 걷는 거위 가족을 발견하기도 한다. 솜털이 보송한 아기 거위가 어찌나 귀여운지 한참을 바라보게 된다.


기념품 숍에는 큐에서 발간한 보태니컬 책들, 꿀이나 잼, 티 같은 먹을거리, 향이 끝내주는 비누와 핸드크림 등 화장품류, 엽서, 찻잔과 티 타월 등 티 웨어들이 있다. 하나같이 탐이 나는데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갈 때 짐을 생각해서 무엇을 얼마나 사 가야 할지 고민이다.
(심지어 큐 가든의 로고조차 영국에서 흔히 쓰는 볼드한 영미식 서체와 비교되는 우아함이 있는 것 같다.)



런던에 온다면 큐 가든 방문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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