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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May 20. 2022

청둥오리의 사정

아름다운 봄날 목격한 범죄의 현장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오후의 아이 친구 엄마와 약속 시간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날씨가 좋아서 근처 공원 호숫가 벤치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영국 공원에는 여러 가지 동물이 참 많다. 호숫가에는 백조나 오리, 거위, 갈매기나 이름 모를 물새들이 놀고 있다. 땅에는 비둘기, 까치, 까마귀 같은 익숙한 새들도 많고, 참새보다 더 작고 오렌지색 배 부분이 너무 귀여운 로빈, 초록 앵무새도 종종 보인다. 포유류 중에는 청설모가 많고 어스름이 질 때면 가끔 여우를 보기도 한다.


호숫가에 앉아 우아하게 헤엄치는 백조를 보고 있자면 그 아름다움에 잠깐 넋을 잃다가도, 얼마 못 가 이 녀석들의 고약한 성격이 드러나 와장창 환상이 깨지곤 한다. 백조들은 상당히 호전적이고 먹이 욕심이 많다. 먹이 주는 사람이 근처에 있으면 힘센 녀석이 다른 녀석들을 부리로 쪼아 쫓아내고 혼자 먹이를 차지하려 한다. 꼭 먹이를 두고 다투는 것이 아니더라도 어떤 백조들은 약한 녀석에게 괜한 화풀이를 하거나 집요하게 괴롭히기도 한다.


가끔씩은 오리들과 중닭 정도 사이즈의 검은색 물닭(Coot)들이 영역다툼을 하기도 한다. 대체로는 덩치가 작은 물닭이 물러나는 것으로 금방 끝난다.

하지만 그런 먹이 다툼 혹은 세력권 다툼은 어쩌다 가끔 잠깐씩 발생하는 이벤트일 뿐, 대체로 호숫가는 평화롭다.

게다가 5월의 봄은 새끼들이 깨어나는 계절이다. 아기 백조들은 회색, 캐나다구스의 새끼는 회색빛이 도는 노란색이다. 청둥오리 새끼는 노랑과 갈색, 암적색의 무늬가 있다. 보송보송 솜털로 뒤덮인 아기새들이 뒤뚱거리며 어미를 따르는 모습을 보면 절로 엄마미소가 지어진다. 적게는 2~3마리, 많게는 30여 마리까지 봤다. (아직도 그것이 모두 한 부모가 낳은 새끼인지 의심스럽다. 새들도 공동육아를 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 날 오전, 청둥오리들이 놀고 있는 호숫가는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시끄러웠다.

푸드덕! 꽥! 꿰에엑! 첨벙!

첨벙첨벙! 푸드덕! 꽤액! 푸드덕! 꽥! 첨벙! 푸드덕! 꾸엑! 첨벙!


처음에는 이상하다는 걸 미처 깨닫지 못하고 책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들리는 소리가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 싶어서 호숫가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해 보니…

아, 그건 여느 때처럼 먹이나 영역을 두고 잠깐 다투는 것이 아니었다. 짝짓기 시즌의 막바지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남겨 보려는 처절한 경쟁과 폭력의 현장이었다.


암컷 청둥오리들은 잠시도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암컷이 보이면 수컷들은 암컷의 목덜미를 부리로 물어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그 위로 올라가 짝짓기를 시도했다. 암컷들은 도망을 다녔다. 그럴수록 수컷은 암컷의 목덜미를 세게 물었다. 굉장히 폭력적인 방식의 짝짓기였다.

한 놈이 암컷을 세게 물어 올라타는 데 성공하면 그 주위로 5~7마리의 수컷들이 다 같이 몰려들어 그 한 마리의 암컷을 물고 제각기 짝짓기를 시도했다. 당하는 암컷은 처절했다. 거의 물에 잠긴 채 허우적대며 도망가려 했지만 5마리가 넘는 수컷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꼼짝 못 하게 부리로 물어 대니 쉽게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Ducky gang bang의 현장.


너무 끔찍해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내 옆에서는 유모차를 끌고 가던 백인 엄마가 나와 같은 표정으로 그 현장을 보고 있었다.

“How terrible… How horrible…”


한참을 혼란 속에서 푸드덕 대다가 드디어 암컷이 도망쳐서 근처 나무로 날아갔다. 그 뒤로 두세 마리의 수컷이 따라 날아갔다. 그 엄마는 박수를 쳤다.

인간의 기준에서 보기에 너무 잔인했던 범죄의 현장. 하지만 다른 종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일에 개입할 수 없었고(돌이라도 던지고 싶었지만 그것은 또 동물학대가 아닌가.) 다른 오리나 새들은 옆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 옆에서는 다른 암컷이 새끼들을 데리고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는데, 수컷들은 다른 수컷이나 새끼와 함께 있는 암컷은 괴롭히지 않았다. (아마도 번식을 끝낸 암컷은 내뿜는 호르몬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짝짓기 시즌의 막바지, 얼마 남지 않은 Available 한 암컷을 두고 수컷들은 더할 나위 없이 호전적이었고, 끊임없이 폭력적인 짝짓기를 시도하는 수많은 수컷들 사이 소수의 암컷들은 매우 비참했다.


나중에 청둥오리의 생태나 습성을 찾아보니 오늘 목격한 상황은 전형적인 그들의 습성이었다. 오리 종(種)이 대체로 수컷 간 번식 경쟁이 심하고 이에 따라 암수의 진화적 적응 또한 다채롭게 이어져서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던 것 같다. 여러 가지 눈길을 끄는 자극적인 연구 결과들이 많았다.

청둥오리는 번식기에 일부일처의 쌍을 이루어 몇 개월을 함께하다가 알을 낳으면 수컷이 떠나고 암컷이 혼자 산란하여 새끼를 기르는데, 이때 정상적인 방식으로 짝짓기에 실패한 수컷 청둥오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짝짓기를 시도한다고 한다. 조류학자들이 밝혀낸 청둥오리의 짝짓기 습성은 오늘 직접 목격한 것보다 (인간의 기준에서) 훨씬 잔인하고 비윤리적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다. 대부분의 조류가 암컷의 동의를 구한 뒤 평화롭게 짝짓기를 하며, 청둥오리 중에서도 힘과 매력이 있는 주류 그룹은 일부일처의 평화로운 방식으로 짝짓기를 한다.

하지만 여기서 밀린 마이너 그룹이 얼마나 폭력적인 방식을 취하는지, 그들을 이끄는 진화적 본능이 얼마나 원초적인 것인지 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이 인간 세상의 서사들이 겹쳐 보였고, 마음이 불편했다.

물론 나의 불편한 마음은 그저 인간의 사회성과 윤리와 규범을 버리기 어려운 ‘나’의 것일 뿐, 자연은 가치 판단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사회라면 당연히 개입과 조정이 필요하겠지만 이건 그들의 사정일 뿐. 청둥오리의 세상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 이들을 평가하는 것도 적절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저, 속으로 바라 본다. 이 메이팅 시즌이 끝나고 암컷 오리들도 평화롭게 호수를 헤엄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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