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로서 나이 들어 간다는 것
영국에서 내 생일을 맞았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이지만 올해는 여느 해와는 다른 느낌이다.
영국에서 맞이한 첫 생일이기도 하고, 올해는 결혼 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십진법으로 세는 나이의 앞자리 수가 바뀌는 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은 당연히 아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과 혼란의 시기를 지나 나와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깊어지고 평온을 찾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한 명의 여자로서 나이가 들어 가는 것은 더욱 편안한 일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타인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성적 대상’으로 여겨지는 시기를 넘어섰기 때문인 것 같다.
젊은 미혼의 여성이란, 그 자체로 귀한 생물학적 자원인지라 언제 어디서든 눈길을 끌게 되어 있다.
성장하여 번식하는 것은 생명 있는 유기체로 태어난 모든 것들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업이므로 우리는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조차도- 얼마나 지적이며 교양을 쌓았는지와는 별개로 20대의 젊은 여성에게는 성적 대상화의 시선을 어느 정도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젊은 여성들은 인생 전반부의 꽤 긴 기간 동안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거나,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킬 만한 매력 수준을 타인으로부터 계속해서 평가받게 된다.
지난 글에서 메이팅 시즌 미처 짝을 찾지 못한 청둥오리 암컷들이 끊임없이 들이대는 수컷들을 피하느라 한시도 편히 쉴 수 없는 상황을 썼는데, 사실 인간 세상에서도 방식과 규칙이 다를 뿐 본질은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성적 대상화가 되는 젊은 여성들이 경험하는 일상적인 불쾌한 경험들은 이런 것이다.
원치 않는 상대로부터의 욕망에 찬 시선 혹은 직접적인 추근덕거림. 대중교통 같은 곳에서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당하는 성추행. 면전에서 혹은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당하는 성적 대상화의 평가들. (이런 평가는 매우 흔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본인에게까지 전달되곤 한다.)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싶은 상황이나 집단 안에서 그저 ‘젊은 여성’이라는 방식으로만 대우받는 것. (대체로 그들의 지위나 발언권은 평균적으로 1인분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에 훨씬 못 미친다.)
물론 젊은 여성이기에 가능한 긍정적인 경험도 있을 수 있다.
아리따운 젊은 여성에게 흔히 제공되는, 남성들의 친절과 미소, 크고 작은 호의 같은 것들이다. 꼭 어떤 대가까지 바라는 것이 아니더라도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에게는 삶의 많은 부분들에서 훨씬 더 많은 친절과 호의가 베풀어진다. 만약 일찌감치 위험을 간파할 능력이나 타인에 대한 존중, 배려 등 여러 측면에서 적정한 선을 파악하는 통찰력을 갖춘다면 아름다운 젊은 여성으로 사는 것은 아주 즐겁고 신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경험도 지혜도 (미모도?) 모자랐고 주어진 것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영리함도 없었던 나의 20대는 대체로 혼란스럽기만 했고 따라서 늘 불안했고 화가 차 있었다.
이런 혼란과 불편은 결혼을 하고 엄마가 된 후로 비로소 사라졌다.
누구에게나,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그저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고, 또 나이와 경험에 대해 존중받는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나는 ‘성적 대상화’의 먹잇감이 되지 않아도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유부녀를 대상으로 성적인 평가를 (적어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며, 남편 있는 여성에게 추근덕거리는 것도 터부시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만의 개인적인 경험은 아닐 것이다. “결혼하고 나니 추근덕대는 사람도 없고 이러쿵 저러쿵 하는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아 너무 후련하고 기분이 좋아요.” 회사에서 나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도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번 달 나이대가 바뀌는 생일을 맞이하기도 했고, 또 영국 생활 5개월 차에 최근 두 번째로 남성들의 접근(?)을 받았는데 너무 오랜만의 이런 경험이 새삼스럽고 어색해서 ‘여성으로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정도 나이면 좀 더 세련되게 처신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20대 때의 당혹스러운 감정이 환기되어 후다닥 자리를 피해 버렸다.
이 글을 볼 남편이, 착각하지 말라고 비웃을지, 혹은 왼손 약지에 반지를 꼭 끼고 다니라고 주의를 줄지 모르겠다. 보고 있나, 남편?)
대체로 브런치에서의 글들은 영국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과 우리나라와의 차이에 대해 쓰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들은 1:1로 문화 간 비교가 되질 않는다. 지금 나는 나이도 더 먹었고 아이를 둔 유부녀이고 인종과 언어가 다른 외국인이기도 하므로.
여하튼 이렇게 온갖 동식물이 만개하는 5월, 나이 들면서 편안해진 부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자니 나의 새로운 10년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씩 보이기 시작하는 흰머리도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노력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