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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Jun 16. 2022

엄마들의 흔한 잡념

아이를 가르치다 보니


하나의 인간 아이가 태어나 사람답게 성장하는 데에는 어찌나 많은 영역이 필요한지. 늘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어디선가 또 구멍이 보이고, 나는 과연 엄마로서 잘하고 있나 자괴감이 들곤 한다.

내가 몸으로 부딪쳐 가며 깨닫고 배우게 된 것들을 내 자식이 그대로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했던 실수는 피해 가고, 내가 경험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아이는 처음부터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을 유전학적으로 말하자면 ‘획득 형질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는 그런 획득 형질의 유전에 대해 진지하게 주장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기린이 목을 길게 늘어뜨려 나뭇잎을 먹을수록 목이 조금씩 길어지고, 그것이 유전되다 보니 기린의 목이 길어진 거라고 주장했던 18세기 과학자 라마르크처럼. 하지만 이런 종류의 유전 이론은 19세기 다윈의 등장 이후 심한 조롱을 받으며 대부분 폐기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후성유전학’이 등장하여 오래전 용도 폐기된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이 다시 재조명받게 된다. 유전학적 관점에서 보면 매우 단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부모, 조부모 세대의 경험이 자손에게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현상이 발견된 것이다.

과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대표적인 사례가 있다.

2차 대전 기간 중 독일 나치군은 네덜란드를 봉쇄였고 이 지역 사람들은 극심한 기아 상황을 겪었다. 그런데 임신 초기 이 기근을 겪은 임산부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비록 정상 체중으로 태어났더라도 이후 성인병이나 비만의 확률이 훨씬 높았고, 심지어 이들이 낳은 다음 세대의 아이들도 심각한 고혈압, 비만, 당뇨를 많이 앓았던 것이다.

연구 결과, 부모가 태아 시절 경험한 극심한 영양 결핍은 유전자 자체의 변화는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DNA에 붙는 메틸기를 활성화시켜 특정 유전자를 발현시킬지 묻어둘지 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성유전적 표지(Mark)를 달고 태어난 아이들의 몸은 ‘혹시 또 생길지 모를 극심한 기아 상태를 대비해야 한다’는 유전적 절박함을 간직하고 있었고, 에너지를 어떻게든 더 많이 저장해 두려 했다. 그 결과 이들은 일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유지하더라도 훨씬 높은 비만율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실험실의 생쥐로 비슷한 연구가 세계 곳곳에서 이루어졌고 부모 대의 트라우마와 약물 남용, 스트레스는 자식에게도 유전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 후성유전에 대한 연구는 아주 초기적인 수준에 이르렀을 뿐이다. 인간에게 후성유전이 얼마나 다양한 범위에서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히 어떻게 스위치가 켜지고 어떻게 꺼지는지 등 수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아직 과학이 밝혀낸 명쾌한 해답이 없는 상황에서, 한 번 가설을 세워 보는 것은 어떨까?

이렇게 유전자에 각인될 정도의 기억이라면 대체로 생존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대한 경험과 깨달음일 것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는 ‘이렇게 하니 좋더라.’라는 긍정 피드백보다는 ‘이런 경우 위험하더라.’라는 부정 피드백이 많을 것이다. 또한 무한히 많은 메시지가 중첩될 경우 메시지 간 교란과 희석이 발생할 것이므로, 전달되는 유전적 메시지는 가장 중대한 한두 가지로 제한될 것이다.

그 카테고리는 대체로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자면 ‘폭력 혹은 전쟁, 안전과 보호, 영양섭취, 사회성과 고립, 자원의 부족에 대한 스트레스’ 정도가 아닐까? 그것이 근원적으로 인간을 죽음의 공포에까지 몰고 가는 대표적인 것들일 테니까.


 

그렇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유전자 속에 무언가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부모의, 조부모의 트라우마와 공포가 내 몸에도 각인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가 남아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그런데, 과연 그 전 세대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혹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경험과 교훈이 21세기 현재를 사는 나에게 금과옥조가 될 만큼 소중한 레슨이 될 수 있을까? 한국 사회는 지난 70여 년 간 너무 많이 변하지 않았던가.

당장 나의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경험하셨던 세대이다. 나의 부모님은 독재정권과 민주화, 공업화와 도시화를 처음으로 겪은 세대이다. 나는 한국이 개도국에서 선진국이 되는 시대를 목격하며 살고 있다. 장차 우리 아이가 살아가게 될 시대는 어떤 시대가 될지 아직 규정하지 못하겠지만 분명히 나와는 또 다른 시대가 될 것이다.

세계 최빈국에서 최고 선진국 대열에까지 오르는 동안 각 세대별 경험은 너무나 달라졌는데 내 몸 안의 유전자는 아직도 조부모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에게 교육을 시키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아, 그냥 일일이 가르칠 필요 없이 내가 아는 것까진 그냥 다 갖고 태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에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다가 이런 생각까지 왔다.

여기까지 이르고 보니, 후천적인 획득 형질이 대체로 유전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처럼 빠르게 바뀌는 세상에서 한 세대, 두 세대 이전의 교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썩 현명한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중년 정도 되면 그간 형성한 삶의 방식만 바꾸려는 것도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일진대, 태어나기 전부터 Pre-load된 프로토콜을 변경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그렇게 심어져 있는 프로토콜의 존재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오늘도 아이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열심히 가르쳐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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