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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김 Feb 07. 2022

새끼 품은 어미의 고단함이여


3년 전, 큰맘 먹고 좋은 휴양지로 여행을 갔었더랬다.

에메랄드빛 따뜻한 열대 바다와 흰 모래, 산호, 바다거북이 있는 곳이었다.


섬 위에는 우리 리조트 뿐이었다. 바다 위로 개별 숙소들이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교묘한 각도로 배치되어 있었고, 각각의 숙소마다 단독 수영장과 멋진 야외 그늘막, 소파가 있었다. 개별 숙소 앞 데크에는 해먹이 설치되어 있어 아래로 에메랄드 바닷물이 훤하게 보였고, 밤에는 헤엄치는 상어도 볼 수 있었다. (열대 바다의 상어는 어른 팔뚝만 한 소형 종이라 위험하지 않다.)

리조트에서는 스노클링 장비를 대여해 주었고, 데크 끝에는 숙소에서 바다로 바로 내려가 볼 수 있도록 사다리와 간이 샤워시설이 있었다.


에메랄드빛 아름다운 바다와 환상적인 흰 모래는, 사실은 살아 있는 산호초가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리조트에서 제공하는 키즈 프로그램 중 산호 살리기 체험이 있어 Nursery Frame에 산호 묘목을 고정시켜 보고 산호에 대한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산호는 ‘동물’이라고 강조했는데 ‘묘목’ 외에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건강한 산호는 색이 좀 더 거뭇거뭇했다. 살아 있는 Coral Reef, 산호초 군락은 작은 물고기들이 숨고 알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고 그 주위에는 또 큰 물고기들이 모이므로 산호초 주위에는 열대 바다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하지만 지금은 지구 온난화와 바닷물의 이온 농도 증가 때문에 점점 산호의 백화현상이 흔해지고 있다고 한다.


하여튼, 우리 리조트 주위에는 살아 있는 산호초 군락이 많지 않은 환경이라 스노클링의 재미는 별로 없는 편이었고 어린 아이가 있었던 우리에게도 오픈워터 다이빙은 우선순위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 번, 스노클을 끼고 제법 멀리까지 갔던 남편이 바다 한가운데서 벌떡 일어나 “아악!” 고함을 치더니 급하게 헤엄쳐 돌아오는 것이었다.

커다란 물고기가 공격해서 엉덩이를 물렸단다. 수영복을 뚫고 들어온 커다란 이빨 자국에 피까지 났다.


“으이그, 그거 좀 보겠다고 어디 알 품은 물고기가 있는 산호초 근처에서 얼쩡거렸구나.”

나는 보자마자 말했다.


리조트 직원은 간단한 응급처치를 해 주고, 타이거 피시라며 산란기에 사나워지니 조심하라고 했다. 남편은 나한테 어떻게 그걸 알았냐고 신기해했다.  

흠... 글쎄, 그건 여기 이 지구에서 한 생명체로 태어나 새끼를 낳아 길러 본 암컷이라면 종(種)을 떠나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이를 동반하고 있으면 엄마는 예민해진다.

평소에는 편안하게 받아들일 작은 외부 자극도, 혹시 위험한 요소는 없는지 본능적으로 경계한다. 아이 주변을 쉬지 않고 살피느라 대화나 다른 일에 집중력도 떨어진다.

비유하자면, CPU의 최소 30%는 ‘아이의 안전’이라는 작업에 항상 우선 할당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뇌의 가장 안쪽, 원시적이고 동물적인 본능의 영역이므로 사회적 배려, 친절, 매너, 예의 같은 것은 모든 인간적이며 고차원적인 프로세스에 우선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호모 사피엔스 종의 암컷들은 고등한 사회적 존재로서 최소한의 규칙도 지켜야 한다. 가끔 너무 이기적으로 구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 엄마들조차 그 자신의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엄마들도 유전자에 아로새겨진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가련한 생명체일 뿐이다. 한편으로 계속해서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황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엄마는 아이가 잘 때, 믿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잠시 아이를 맡길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한 몸과 마음의 이완을 경험할 수 있다. 100%의 한 인간으로, 눈앞의 일과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남들을 배려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끼 품은 어미의 고달픔을 이해해 주고, 조금 더 기다려 주고 조금 더 양보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요즈음의 한국 사회는 대체로 엄마들에게 가혹하다. 애 엄마가 아이 없는 때와 동일한 매너 수준을 보이지 못하면 가차 없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노파심에 굳이 보태자면, 나는 민폐 끼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에 아이의 예절교육에도 특히 더 신경을 쓰고 아이와 함께 외출할 때는 나도 특별히 더 조심한다. 하지만 때로는 잘하고 있을 때조차 무명의 마주치는 이들로부터 “얼마나 개념 없는 엄마인지 지켜보겠어.”라는 적대감이 내재된 시선을 느낀다.


반면, 이곳 영국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되는 느낌을 거의 받지 않는다.

적대감 어린 시선 앞에서 더 과장된 예의와 매너를 증명하여 “나는 개념 없는 엄마가 아니에요.” 라는 메시지를 애써 전달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를 학교에 학교에 데려다주는 길, 작은 마주침 하나하나에서 다양한 인종의 여러 사람들에게 작은 배려를 받고, 홀가분하게 혼자 돌아오는 길에는 반대로 내가 아이를 동반한 엄마에게 배려를 베풀면서 문득 ‘새끼 품은 어미의 고달픔’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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