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비건의 천국에서 고기를 굽는다
요즈음 영국의 트렌드는 ‘Vegan’인 것 같다.
도심의 세련된 카페와 고급 레스토랑부터 동네의 푸근한 식당까지 온통 비건 메뉴를 앞세우고 있다.
TV에서는 비건 요리법을 소개하고 잡지에서는 핫한 비건 식당 리스트를 올려 준다.
“난 비건이에요.” 라는 말은 곧 “나는 트렌디하고 깨어 있는 사람이에요.” 라는 뜻과 다름없다. 탄소배출과 기후변화와 동물윤리, 프로 비건의 논리는 차고 넘친다.
또 영국은 대체육 산업이 가장 앞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방식도 동물 세포를 배양하는 방식 혹은 콩과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이용하는 방식 등 다양하며, 규모 있는 대기업들도 진출하고 있고 스타트업도 아주 많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러지 않았던가.
어떤 곳에서 강박적으로 반복해서 들리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그 도시에 결핍된 무언가라고.
(그 글에서, 한국 땅의 외국인은 왜 이렇게 한국에서는 여기저기서 ‘행복’ 이야기를 하는지 신기하다고 했다.)
대부분의 웨스턴 국가들처럼 영국도 고기 요리 중심의 식문화를 갖고 있고, 아직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식사의 중심이 고기라는 공고한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럽의 식문화는 평민들이 고기 요리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하는 데 중점을 두고 발전해 왔고, 전 세계 모든 개발도상국들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예외 없이 육류 소비량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인간이 원하는 만큼 충분한 고기를 먹지 못했다. 사냥은 위험하고 성공률이 높지 않은 일이며 길고 긴 농경시대 가축을 길러 잡아먹는 일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을 테니.
이렇듯, 육식은 치러야 할 비용이 비싸서 그렇지 기회만 된다면 대부분의 인간이 자연적으로 선호하는 식습관이다.
그리고 아마도, 19세기 이후의 서유럽, 그중에서도 산업혁명을 최초로 이뤄내고 곳곳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해진 이곳 영국 국민들이야말로 인류사 최초로 일반 대중이 ‘먹고 싶은 만큼 실컷 고기를 먹어 보는 경험’ 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 가설이 얼마나 맞을지 데이터를 찾아보았다.
구글링으로 찾을 수 있는 1인당 육류 소비 패턴이다. 그래프에서 보는 것처럼 영국의 1인당 고기 소비량은 1960년대 이래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이전 데이터는 찾기가 어려웠다.)
그 수준이 ‘인간이 충분히 만족하는 육류 섭취량’이라고 판단하기엔, 미국과 캐나다는 훨씬 높지 않냐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메리카인들의 식습관에는 금욕적인 청교도 문화로 인한 억압, 높은 이민자 비율 등 다른 이유들이 좀 더 있다고 생각한다.
(혹시 다음번 '비만'에 대해 글을 써 볼 기회가 있다면 이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해 보겠다.)
이런 배경이 있으므로, 전 세계에서 비건 열풍이 주류 흐름으로 가장 먼저 이곳 영국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고마 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 (뺄까 말까 엄청 고민했던 문구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영국에 고기 좋아하는 한 가족이 한국에서 왔다.
식사 준비 담당인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마트의 정육 코너를 탐색한다.
영국에서는 육류/가금류 가격이 한국보다 더 저렴한 편이다. 비중으로는 닭과 돼지, 소고기를 가장 많이 먹고 양, 오리 등이 뒤를 따른다.
영국은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는 대표적인 식량 수입국이지만, 고기와 달걀 등 축산품은 대체로 British가 많은 걸 보니, 축산업은 꽤 하는 것 같다.
특이하게도 대부분 마트에서 생고기보다 오히려 훈제나 햄, 소시지 등으로 가공한 가공육 코너가 더 넓다. 달달하고 담백한 영국 햄, 프로슈토와 살루미 등 이탈리아 햄, 스페인 햄 하몽 등 갖가지 종류가 다 있다.
한국과 비교할 때 선호하는 고기 종류나 부위가 달라 가격의 상대적인 차이나 역전이 발생하는 경우가 있다. 스테이크용 부위를 제외한 다른 부위나 햄버거, 미트볼 재료가 되는 Minced beef는 아주 저렴하고, 돼지고기는 스테이크용으로 활용되는 등심 부분을 선호해서 Pork belly, 즉 삼겹살이 저렴하다.
삼겹살은 한국보다 두껍게 잘려 있고 지방 부위가 좀 더 적은 느낌이다. 돼지고기는 한국 돼지에 비해 좀 더 맛이 부드럽다고 느껴진다. 특유의 돼지고기 풍미(쉽게 말해 돼지 누린내)가 적고, 지방이 적어서 그런지 더 담백한 느낌이다.
한국에서도 양돈 품종은 대체로 영국에서 유래된 것일 텐데 사료 차이 때문에 맛이 다른가 했더니, 미묘하게 품종도 조금씩 다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사육되는 품종인 ‘요크셔’ 보다 이를 개량한 ‘랜드레이스’ 라는 품종을 많이 기른다고 한다. 요크셔는 Meat type이고 랜드레이스는 Bacon type이라 하니, 등심/안심 같은 부위보다 압도적으로 삼겹살을 선호하는 한국에서는 당연한 선택인 것 같다.
어쨌건, 여기 영국에서 한국인의 소울푸드 삼겹살 한 팩 사서 된장찌개 하나만 곁들이면 한식 갈증도 해소되니 썩 괜찮은 옵션이다.
닭고기의 경우, 여기 사람들은 닭다리보다 닭가슴살을 더 좋아한다. 우리네 정서에서 가장 먼저 집안의 어른에게, 혹은 귀한 손님에게 푹 곤 닭고기의 다리를 뚝 떼어 주는 것처럼 이곳 사람들은 가장 귀한 사람에게 가슴살을 먼저 대접한다고 한다.
또 이곳 사람들은 닭 껍질을 잘 먹지 않는다고 한다. 껍질 벗긴 닭은 그 노동력만큼 더 비싸진다. (바삭하게 굽거나 튀겨진 닭 껍질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 맛을 모르다니…)
그렇다 보니, 껍질 있는 Chicken thigh는 4조각에 겨우 2파운드(약 3,500원) 수준이다. 이만한 양이면 우리 세 가족이 두 끼를 넉넉히 먹을 수 있다. 닭 날개와 닭봉 같은 부위도 아주 싸서, 한 팩 사다가 소금 후추만 뿌려 오븐에 구우면 한 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문제는, 닭 껍질에 있는 닭털이 남아 있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는 것… 하긴,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도 생닭 손질은 비위가 좀 상하는 일이었다.
소고기 스테이크도 한국에서보다는 편한 마음으로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다.
다만, 영국에서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불고기용으로 얇게 썬 소고기를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달달하고 짭짤한 불고기 양념에 버섯을 듬뿍 넣은 불고기가 얼마나 맛있는데… 한인마트에서 어렵게 공수한 불고깃감도 아주 두껍기 그지없었다. 아쉬운 대로 간 고기에 불고기 양념을 해서 볶아 먹기도 한다.
영국에 온 지 한 달째, 지금까지는 팬에 지지고 오븐에 굽는 등 익숙하고 쉬운 방식으로 요리를 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향신료나 양념을 쓰는 고기 요리는 아직 시도를 못 하고 있는데, 조만간 영국식 로스트비프나 개먼(Gammon) 요리에도 도전해 보려 한다.
흠, 그나저나...
전 세계적 비건 열풍 속에 비건의 중심 런던에서, 우리 가족은 언제쯤 비건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오늘도 고기를 구우며 양심의 가책 한 스푼과 방어의 논리 한 냄비가 마음 속에서 뒤섞인다.